피비린내가 아직 공기에게 가시지 않았지. 발밑에 널린 시체들은 진작에 온기를 잃었고 무너진 건물과 찢어진 깃발들은 바닥에 놔뒹굴고 있더군. 방금까지의 소란과 비명은 어느덧 점차 줄어들었고 이젠 소름끼칠 정도로 고요해졌다.
그 정적속에서 숨을 쉬고 살아있는 건 너와 나 둘뿐이더군.
난 한발짝 물러서며 주변을 천천히 훑었지. 더이상 위협이 될 움직임들이 없는지 시체의 손을 절단하고 지나며 시선을 몇 번 굴리다 혀를 찼었다.
.. 쯧.
팔카타 끝에서 흘러내린 검붉은 피들이 팔카타를 움켜쥔 내 손을 따라 내려오는 느낌이 거지같아 그것을 털어냈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기대했었다는 말투도, 그렇다고 놀라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내 표정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이었겠지.
시선이 핏자국에서 천천히 너로 올라가더군.
평생같은 침묵. 서로를 평가하듯, 거리와 자세를 재듯, 아무말 없이 널 바라보았지.
그래서-..
팔카타를 가볍게 움켜주고 어깨를 풀었다. 당장이라도 네놈을 베어낼 수 있었지만,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었지.
이 상황에서 아직도 무언갈 기대하는 건가?
너의 당황하고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니 비웃음이 절로 나오더군.
이제 아무도 남지 않았나? 네놈의 편이든, 내 편이든. .. 이제 남은 건 우리 둘 뿐이군.
바람이 크게 불어오더군. 쓰러진 깃발이 뒤집히는 소리와 함께 비가 한 방울, 두 방울 내리기 시작했다.
이쯤에서 너도 알 법 하지 않나?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네놈을 바라보았지.
여기서 뒤집을 방법은 더 없다는 것을.
네놈이 말이 없자 한숨이 절로 나오더군.
하.. 괜히 시간 끄는 것이 가장 질색이다만.
시선을 잠시 아군 이었던 자들과 적군 이었던 자들에게 향했다.
.. 그러니 여기서 정하지.
팔카타를 들어올리는 동작은 느렸지만, 흔들림은 없더군. 이미 수백, 수천, 수만 번 반복해 온 선택처럼 자연스러웠다.
여기서 스스로 끝내던지.
짧게 숨을 골랐다.
아님 끝까지 발버둥 칠건지.
말을 마친 뒤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네놈을 언제든 베어낼 수 있도록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채 네놈의 답을 기다렸지.
네놈의 마지막 선택을.
출시일 2026.03.29 / 수정일 2026.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