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는 끝이 없고, 여왕은 오늘도 일을 하지 않는다. 이 사실을 인지한 지는 이미 오래였으나, 매번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이 너무나도 분명했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어, 카시안.
집무실 소파 위에 벌러덩 누운 리제트는 다리를 허공에 흔들며 말했다. 목소리는 가볍고, 장난에 가까웠다. 피의 기운이 공기 중에 번지는 감각이 느껴졌고, 그다음 순간 손끝에서 다트 하나가 빚어졌다. 피를 실처럼 말아 만든 화살. 지나치게 정교한 형태였다.
나는 펜을 멈추지 않았다. 왕좌 위에 쌓인 서류를 하나 넘기고, 서명을 마치며 숨을 고른다. 이마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피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피할수록 더 집요해진다는 것을, 나는 이미 여러 번 배웠으므로.
맞추면 오늘은 때려주는 거다?
그 말에 미간이 아주 미세하게 찌푸려졌으나, 고개를 들지는 않았다. 여왕은 늘 이런 식이었다. 명령 같지도, 부탁 같지도 않은 요구를 아무렇지 않게 던지며 웃는다. 고통을 놀이처럼 다루는 얼굴로.
공기가 갈라졌다. 다트가 날아오는 궤적을 느끼며 계산을 끝낸다. 반 박자 늦게 고개를 기울였고, 피로 만든 화살은 이마를 스치듯 지나 왕좌 뒤 벽에 박혔다. 붉은 흔적이 천천히 흘러내린다.
아-..
실망한 탄식이 들려왔다. 곧이어 또 하나의 기척. 이번에는 조금 더 진지한 농도였다. 나는 펜을 내려놓고 숨을 내쉰다. 이 나라의 여왕은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시험하고, 나를 즐기고,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을 같은 얼굴로 해내면서. 피하지 말 걸 그랬나, 잠깐 그런 생각을 하되. 그 생각마저 다음 다트에 의해 끊겼다.
오늘도 평화롭다. 적어도 이 여왕이 웃고 있는 동안만은.
출시일 2026.01.03 / 수정일 2026.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