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이 잘 들지 않는 방 습기에 부푼 꽃무늬 벽지 위로 기억에도 없는 계절이 핀다 풀기가 말라 들뜬 모서리는 누군가 숨겨둔 고백의 틈일까 손때 묻은 들꽃들을 가만히 짚어보면 바스러지는 종이 소리가 서늘하다 화려했던 분홍빛은 먼지에 가려지고 넝쿨은 벽을 타고 자꾸만 도망치는데 다시 바를 수도, 차마 뜯어낼 수도 없어 낡은 무늬 아래 웅크려 앉으면 어디선가 눅눅한 꽃향기가 났다.
몸이 약해 남들보다 한참 늦게 간 군대였지. 전역하면 이 넝쿨장미 가득한 방에서 벗어나서, 더 넓고 좋은 집에서 함께 살자고 네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었잖아. 훈련소 찬 바닥에 누워 눈을 감으며 떠올렸어. 밤마다 나란히 앉아 장미를 세던 네 손가락 끝, 그 보드라운 온기 같은 거 말이야. 97, 98, 99…. 삐뚤빼뚤한 넝쿨 사이에 숨은 꽃송이까지 다 찾아내면서, 우리 사랑도 이 벽지 속 장미들처럼 절대 시들지 않을 거라고 믿었어. 마침내 전역하던 날, 얇은 신문지에 빨간 장미 한 송이를 정성껏 싸 들고 골목을 미친 듯이 달렸어. 오늘로 이 방의 장미는 비로소 100송이가 됐으니까. 그런데……, 기다리겠다던 너는 내가 돌아올 길을 닦기는커녕, 우리가 머물던 이 작은 세계를 통째로 들어내 팔아치웠다며? 서류 몇 장에 우리 맹세를 홀랑 팔아넘기고, 너는 내 손의 100번째 장미가 도착하기도 전에 자취를 감춰버렸구나. 내 모든 걸 걸었던 약속이 신문지 속에서 처참하게 짓눌리고 있어. 이제 내가 돌아갈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네. 넌 지금 어디서 웃고 있니. 28살
사랑만으로 장미를 피우기엔 이 방이 너무 눅눅하더라. 네가 돌아와서 마주할 게 가난뿐이라면, 차라리 내가 나쁜 년이 되어서 사라지는 게 낫겠지. 미안해. 100번째 장미는 네 손으로 꺾어버려. 그게 네가 나를 잊는 가장 빠른 방법일 테니까. 무현아, 장미는 종이 위가 아니라 흙 위에서 피는 거더라. 넌 꼭 그런 사랑을 해.
그녀와 함께 살 꿈에 부풀어 돌아온 집엔 낯선 짐들이 놓여있었다. 그녀는 내가 군대에 있는 사이 집을 처분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열린 문틈 사이로 보인 건 짐을 풀고 있는 생판 모르는 여자애였다.
그녀와 나란히 앉아 장미를 세던 그 벽지 앞에, 이제는 다른 사람의 짐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내 명의까지 빌려 마련했던 우리의 첫 보금자리가 타인의 공간으로 변해버린 현실 앞에서, 손에 쥔 장미 한 송이가 처참하게 뭉개졌다.
벽지를 훑어 보며
벽지가 진짜 화려하네. 요즘 누가 이런 꽃무늬를 쓴다고.
촌스럽죠. 나도 방금 알았네, 이게 이렇게 값구겨진 종이 쪼가리인 줄.
힘없이 벌어진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구겨진 신문지 틈으로 빠져나온 장미 줄기가 바닥에 툭, 떨궈졌다. 그는 초점이 나간 눈으로 낯선 여자가 서 있는 벽지를 훑었다. 한때는 구원 같았던 분홍빛 넝쿨들이 이제는 빛바랜 종이 쪼가리가 되어 그의 눈을 아프게 찔러왔다. 헛웃음을 삼키며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나랑 친구할래요? ….자주 놀러오고 싶어서.
박무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작게 덧붙였다.
아저씨는 아니지 않을까 싶은데. 그쪽보다 나이가 많을 진 몰라도.
친구. 친구라니. 미친 놈이거나, 세상 물정을 모르거나, 아니면 그냥 외로운 놈이거나. 셋 중 하나겠지. 아마 나도 그중 하나일 테고.
그래.
어색하게 반말을 굴려보니 입안에서 모래알처럼 까끌거렸다. 반말을 쓸 상대가 몇 년 만인지. 군대에서 후임들한테 던지던 건조한 반말 말고, 이렇게 사람 냄새 나는 반말은 기억에도 없었다.
근데 이름 안 알려줄 거야? 친구라며.
까치발을 들고 벽 천장 즈음에 달린 벽지 끝동을 붙잡은 채 끙끙거리고 있었다. 지독하게도 눌어붙은 종이는 그녀의 가냘픈 손길로는 어림도 없다는 듯 버티고 있었다.
문가에 기대어 그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던 무현이 무거운 한숨을 내뱉으며 다가왔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벽지 속 낡은 장미들에 머물 러 있었지만, 거칠게 일어난 종이 끝에 걸린 그녀의 위태로운 손톱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뭐야, 거기 있었어요?
비켜봐. 그러다 손톱 다 나가.
그녀의 어깨너머로 긴 팔을 뻗었다. 지독하게 들러붙은 벽지 귀퉁이를 단단히 거머쥐었다.
찌익- 낡은 장미 무늬가 힘없이 뜯겨 나갔다.
무현은 바닥으로 추락한 빛바랜 종이 꽃잎들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헐!! 오늘 나 도배하는 것 좀 도와주면 안돼요??
손에 들린 벽지 조각을 멍하니 내려다 봤다. 손가락 사이로 먼지가 후두둑 떨어졌다. 꽃무늬였던 것의 잔해가 손바닥 위에서 초라하게 구겨져 있었다.
왜 새로 하려고?
그에게 있었던 얘기를 들었다. 처음 본 날 한송 이 장미를 들고 있던 것도, 그때 그의 손에 끼워 져 있었던 낡은 반지도. 그의 낡은 이야기는 그의 마음도 낡게 만들었다.
그랬구나...
방을 보며
벽지는 왜 같이 떼준 거에요...
사람 바보 만들어..
그 눈 좀 치워. 너까지 그렇게 보면 내가 진짜 불쌍한 놈 같잖아.
그녀의 시선을 피해 창밖 어둠 속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낡고 눅눅한 이야기가 그녀의 깨끗한 세상에 얼룩을 남기는 게 화가 났다. 그는 마른세수를 하며 낮게 읊조렸다.
여태 모른 척하고 지내니까 좋더라. 내가 평범한 사람인 것 같아서. 근데 딱 거기까지 하자. 너는 이런 거 몰라도 돼.
피우던 담배를 구두 밑창으로 거칠게 비벼 껐다. 연기 사이로 비치는 그의 눈동자는 텅 빈 집터처럼 공허했다. 그는 자신을 붙잡으려는 상대의 손길을 가볍게 쳐내며, 오히려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난 추억 같은 거 못 만들어. 너랑은 더욱 더.
너처럼 생생한 애가, 내 눅눅하고 낡은 이야기에 끼어들어서 같이 썩지 않았으면 좋겠어.
바닥에 앉아 있던 몸이 굳었다. 며칠간 이 방에서 들은 건 수도관 소리뿐이었는데. 환청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아니었다.
문틈에 기대선 네 얼굴이 거기 있었다. 볼이 빠져 있었다. 손에 비닐봉지 하나를 들고 있었는데, 편의점 삼각김밥 두 개와 물 한 병이 비닐 사이로 비쳤다.
입을 열려다 닫았다. 또 열었다. 준비해둔 말이 백 개쯤 있었는데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보고 싶었다는 말도, 왜 갔냐는 말도, 다 목구멍에서 엉켜붙었다.
연아..
눈을 떼지 못했다. 비닐봉지를 든 네 손가락 끝을, 살짝 마른 손목을,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눈이 기억하고 있었다. 전부.
저 여자구나.
그 모습을 그저 바라만 보다 뒤돌아 섰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사이의 끼는 것도. 어차피 다 안될테니까.
그의 눈에 그녀의 뒷모습이 실렸다.
드디어 이 날이구나,
누구든, 이제는 비워야만 하는 날.
출시일 2026.04.26 / 수정일 2026.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