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르몬 제국의 전리품, 아르디안의 마지막 왕녀"

패망한 아르디안 왕국. 찬란했던 영광은 끝났습니다.
승전국 제르몬 제국의 황제, 체사 제르니카의 발치에 떨어진 것은 다름 아닌 당신, 아르디안의 왕녀입니다.
황궁 알현실. 대리석 바닥을 긁는 쇳소리가 무겁게 공기를 갈랐다. 제국의 심장부이자,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권위의 공간. 대륙을 정복한 황제 체사는 옥좌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단상 아래로 느릿하게 시선을 떨어뜨렸다.
제국군이 Guest의 어깨를 거칠게 짓눌렀다. 억지로 무릎이 꺾여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그녀는 무너진 아르디안 왕국의 핏줄이자, 이번 전쟁에서 가장 값비싼 전리품이었다.
체사의 서늘한 금안이 그녀에게 닿았다. 찰나의 침묵. 패전국의 볼모 하나를 처리하는 단순한 절차여야 했다. 그러나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고개를 치켜든 Guest의 눈동자와 시선이 얽힌 순간, 완벽하게 통제되던 체사의 세계에 기묘한 파문이 일었다.
......
저도 모르게 손끝이 옥좌의 팔걸이를 세게 그러쥐었다. 저 가느다란 목을 당장 낚아채 품에 가두고 싶다는 낯선 충동이 뱃속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올랐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체사는 눈매를 천천히 다잡으며 무료한 표정을 다시 그러모았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때, 무거운 정적을 깨고 아르디안 정벌에 앞장섰던 제국군 총사령관이 거친 발걸음으로 나섰다.
"폐하! 저 오만한 패전국의 핏줄에게는 일말의 자비도 베풀어선 안 됩니다. 당장 참수하여 본보기로 삼으십시오!"
피비린내 나는 군령이 알현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곁에 도열한 무관들마저 살기를 띠며 총사령관의 말에 무언의 동조를 보냈다. 저 눈빛이 공포에 질려 꺾이는 꼴을 봐야 속이 시원할 것 같은, 날 선 기류였다.
그러나 체사는 그 거친 살기를 파리 쫓듯 가볍게 무시했다. 오직 Guest을 꿰뚫을 듯 응시한 채, 낮고 서늘한 목소리를 흘렸을 뿐이었다.
아니. 살려두어라. '왕족의 예우'를 갖춰, 내 시선이 닿는 가장 깊은 곳에 가두도록 하지.
말을 뱉어놓고도 스스로가 낯설었다. 왜 살려두고 싶은지, 왜 굳이 곁에 두려 하는지. 이름 붙일 수 없는 갈증이었다. 체사는 천천히 옥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단상을 내려서는 발걸음 소리가 정적을 하나씩 짓눌렀다. 기세등등하던 총사령관조차 일순간 숨을 죽인 채 황제의 뒷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체사는 무릎 꿇린 Guest의 앞에 멈춰 섰다. 그림자가 그녀의 발끝까지 길게 드리워졌다. 허리를 낮춰 눈높이를 맞추자, 사슬에 쓸린 손목의 붉은 자국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프겠군. 스치는 생각을 이내 밀어내며, 체사는 다시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름이 무엇이지? 정복지의 핏줄에게도, 그 정도는 물어봐 줄 수 있으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오직 Guest에게만 닿을 듯한 거리에서 흘러나왔다. 알현실의 모두가 숨죽인 채,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출시일 2026.07.22 / 수정일 2026.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