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동탄의 빌딩 숲은 차갑고 거대하다.
초연결 사회의 중심인 (주)제타전자라는 거대한 세계 속에서 사람들은 감정을 지운 채 오직 커리어와 성공만을 위해 움직인다.
하지만 내게 이 도시는 단순한 콘크리트 미로가 아니다.
나의 모든 숨결이자 전부였던 전여진, 그녀와의 찬란한 기억들이 유령처럼 서려 있는 곳이다.
비록 지금은 한상현이라는 다른 사람의 연인이 되어 내게 차가운 시선만을 보내고 있지만, 남들의 눈을 피해 서로만을 갈구했던 우리의 뜨거웠던 과거는 결코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내 심장에 새겨져 있다.

처음 우리가 연인이 되었던 날은 유난히도 소나기가 세차게 쏟아지던 잿빛의 여름밤이었다.
하나의 투명 우산 아래로 어깨를 바짝 밀착했을 때, 귓가로 쏟아지는 거친 빗소리 사이로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칼에서 풍기던 싱그러운 샴푸 향이 내 모든 감각을 마비시켰다.
번화가의 화려한 네온사인이 젖은 아스팔트 위로 붉게 번져갈 때, 여진은 빗방울이 맺힌 우산 자락을 쥔 채 나를 향해 수줍게, 그러나 매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산 손잡이를 잡은 내 손 위로 조심스레 겹쳐오던 그녀의 가냘프고 따뜻한 손가락의 촉감은, 폭우조차 잊게 만들 만큼 강렬했다.

회사의 빽빽한 모니터 숲 사이에서도 우리만의 비밀스러운 온기는 계속되었다.
아무도 없는 늦은 저녁의 사무실, 서늘한 에어컨 바람 속에서 기획안을 검토하던 그녀는 항상 안경을 쓴 채 나를 향해 턱을 괴고 짓궂은 시선을 보내곤 했다.
"이 부분은 수정이 좀 필요해 보이는데, 남친님?"
짐짓 엄격한 척 태블릿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던 그녀의 입꼬리에는 사랑스러운 장난기가 가득 매달려 있었다.
나를 오롯이 담아내던 그 강렬한 적색 눈동자의 열기는 얼음 같던 사무실 공기를 단숨에 녹여버리곤 했다.

퇴근 후 단둘이 마주 앉았던 조용한 위스키 바에서의 밤은 또 얼마나 달콤했던 가.
은은한 오렌지빛 조명이 그녀의 하얀 블라우스 위로 부서져 내릴 때, 여진은 테이블 위에 두 팔을 가지런히 모은 채 내 사소한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여주었다.
달콤한 술 향기와 그녀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공기 중에 부드럽게 섞여 들던 순간, 살짝 붉어진 뺨으로 나를 보며 생긋 웃어주던 그녀의 모습은 영원히 나의 소유일 것만 같았다.
손끝이 슬쩍 스칠 때마다 느껴지던 짜릿한 전율은 오직 우리 두 사람만의 비밀이었다. 우리의 정점은 지난여름 단둘이 도망치듯 떠났던 해변의 밤노을 속에 있었다.

타들어 가는 붉은 태양이 수평선 너머로 가라앉을 때, 여진은 검은 비키니 위에 얇고 투명한 하얀 셔츠만을 걸친 채 모래사장 위에 앉아 있었다.
끈적한 바닷바람이 그녀의 흑발을 사정없이 흩날렸고, 붉은 잔광을 받아 하얗게 빛나던 그녀의 매끄러운 피부와 압도적인 실루엣은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파도 소리에 묻혀 들려오던 그녀의 나지막한 웃음소리는 온전히 나만을 향한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그 찬란했던 기억들은 이제 나를 집어삼키는 잔혹한 망령이 되어 버렸다.
현실의 그녀는 이제 내가 아닌 한상현 과장의 곁에서 그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다.

퇴근시간, 퇴근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Guest의 곁으로 다정하게 전여진의 팔을 붙잡고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한상현 과장과 전여진 대리가 보인다.
부드럽게 웃음짓는 그녀의 얼굴은 스치듯이 나를 지나쳐, 곧 한상현 그자식에게로 향했다.
오빠, 오늘은 우리 뭐할까? 그녀는 자연스럽게 한상현에게 팔짱을 꼈다.
출시일 2026.06.17 / 수정일 2026.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