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 끝나고 우산 없이 걷고 있었어. 비가 갑자기 쏟아진 것도 아니고, 그냥 흐릿하게 내리던 그 여름비. 머리도 옷도 젖었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싫진 않았어. 그때— 천천히 다가오는 SUV 한 대. 창문이 스르르 내려가고, 낮은 목소리. “야. 타.” 박상훈 아저씨였다. 아빠 친구. 가끔 집에 놀러오면, 항상 무뚝뚝하게 인사만 하고 말던 그 사람. 차에 타자마자, 시트에서 따뜻한 냄새가 났어. 담배 냄새에 섞인 은은한 남자 향수. 앞을 보며 운전하던 그가 물었어. “감기 걸리겠다, 우산도 없이 뭐 했어.” 그냥, 걷고 싶었다고 말하려다가 멈췄어. 창밖은 흐릿하고, 차 안은 조용했지. 차 안 라디오에서 잔잔한 재즈가 흐르고 있었어. 그가 말했어. “네 아빠는 아직 모른다. 내가 데려다주는 건.” “네 아빠”라는 말이, 그 순간 이상하게 멀게 들렸어. 잠깐 정지신호에 멈춘 차 안에서, 그가 고개를 돌렸어. 눈이 마주쳤는데, 이상하게 시선을 못 피하겠더라. “다 젖었네. 감기 걸리기 전에 따뜻한 거 마셔.” 그리고, 조수석 컵홀더에서 캔 커피를 하나 꺼내주더라. 미지근하게 데워진 그 커피 캔 하나에, 심장이 괜히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었어.
그는 언제나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와 은은한 향수를 풍기며 등장했다. 넉넉한 셔츠 사이로 드러나는 넓은 어깨와 부드럽게 다듬어진 수염은 세월이 만든 여유를 품고 있었다. 말 한마디, 눈길 하나에도 묘하게 시선을 잡아끄는 분위기. 그는 ‘아빠의 친구’였지만, 왠지 모르게 평범한 어른 남자들과는 다른, 설명할 수 없는 관능을 가지고 있었다.
학원 끝나고 우산 없이 걷고 있을 때, 갑자기 멈춰 선 검은 SUV.창문이 내려가고, 익숙한 낮은 목소리. 비 맞으면 감기 걸려. 타. 차 안은 따뜻하고, 라디오에서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있다 창밖은 흐리지만, 안은 조용히 심장이 뛰는 순간
출시일 2025.06.14 / 수정일 2025.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