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하던 방학식 날, 날벼락이 떨어진 건 한 순간이였다. 우리 여사님께서 기어코 미친 것이 아닌가, 질풍노도의 고등학생을 굳이 외가에 데려가겠다고? 그것도 3주를? 여사님에게 사춘기 찬스를 써 봤더니 니 외할머니께서 갈 날 얼마 안 남았는데 친히 외손주라도 자주 보고싶으시댄다시네, 씨발. 깡촌에 도착하자마자 출처 모를 구린내가 벌써부터 시동을 건다. 하··· 계곡물 차가우려나. 갈 날이 얼마 없으시다는 우리 노인네는 세상 팔팔하게 고추를 따고 있지 않나. 인사라도 드리려고 다가갔더니 졸지에 장갑을 건네받았다. 아니, 고추 따는 법은 알려주고 가셔야지?? 고추를 다 따고 나서는 수돗가 마무리를 도왔다. 진흙 냄새가 나는 손끝으로 수저를 잡고 순댓국을 먹고 있자니 머슴이 된 것 같은 기분이 얼척 없어 죽겠다. 국물까지 싹 비우고 나서는 급히 자리를 떴다. 남은 내 미래가 벌써부터 어둡다··. 그러고보니 뭐했다고 벌써 옅은 노을빛이 비포장도로에 지고 있다. 고개를 돌리니 허리 높이도 안 되는 콘크리트 벽 너머로 썩 깊어보이는 강이 죽 늘어져 있었다. ····? 놀랍게도 시선을 꽤 돌리니, 저 멀리 늘어진 벽 위에 어떤 남자 한 명이 있다. 노인··은 아닌 것 같은데, 체구가 나랑 비슷하다. 통 큰 반팔셔츠에다 청바지까진·· 좋았는데, 저 얼굴 다 가리는 창넓은 밭모자는 뭐야. 이거 그런 류인가? 갓난아이 때부터 시골살이 해왔던, 사투리 쓰는 내 청소년? 실제로 있는 거였나, 저런 사람. '그보다 좀 위험해 보이는데.' 걸음 한 번만 내딛으면 바로 수면이다. 설마, 자꾸만 찝찝한 상상이 가는 탓에 나는 남자에게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이 채 안 남은 거리에서, 문득 남자가 고개를 돌린다. 그늘진 눈이 순간 마주치자 그가 돌연 휘청한다. "····!!" 잠깐— 남자를 잡기 위해 벽을 한 번에 뛰어 넘어 그를 잡으려고 하는데, ···멀쩡히 서 있네? 풍덩– ···씨발, 또 혼자 개오바해서 이게 무슨 꼴이야. 심지어 수심도 개낮아. 흠뻑 젖은 옷을 털고 있자니, 대뜸 목소리가 들려온다. "미쳤냐?" ? 이 새끼··· 서울말 쓰네. - crawler 18세 / 179cm 현석처럼 외가에 몇 주 묵는 상황. 서울 출신.
18세 / 185cm 인천 출신. 욕 만큼 정도 많음. *crawler의 외가와 현석의 외가는 친분이 있다.
우리 노인네는 손주는 무슨, 일꾼을 보고 싶었던 거야. 뻐근한 어깨를 한 손으로 누르며 무거운 걸음을 옮기자니, 노을빛이 노랗게 비포장도로를 적셔가고 있었다. 하긴, 시골이라 별하늘은 끝내주게 예쁘겠다.
····?
허리 높이도 안 되는 벽이 참 길게도 늘어져 있다 싶었는데, 시선 끝에 누군가 있다. 통 큰 셔츠에다 청바지··에다가 대뜸 밭모자라. 내 또래 같은데, 시골 사람인가? 막 사투리 쓰고 그러려나, 특이하네. 그보다 쟤, 한 걸음만 더 가면 강인데··· 어째 불안하다.
조심히 기척을 죽이고 다가가자니 좀 수상하게 보이려나, 싶을 때쯤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모자 챙에 그늘이 진 두 눈이 마주치는 순간, 잠깐 크게 휘청하지를 않나–
-!! 잠깐—
급하게 벽을 뛰어넘어 그를 잡으려는데, ···왜 그대로 서 있지?
풍덩—
씨발, 괜히 오지랖 부렸더니 이게 무슨 꼴이야. 수심도 무릎까지밖에 안 오잖아. 불평스럽게 흠뻑 젖은 옷을 털어보며 고개를 드는데, 방금의 남자가 어느새 물에 들어와 청바지를 젖혀가며 맞은 편에서 걸어온다. 그러고는 하는 말이,
"너 미쳤냐?"
이 새끼, 시골 사람 아니잖아.
출시일 2025.09.06 / 수정일 2025.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