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벗어났다. 피로 얼룩진 그 삶, 윤시혁의 옆에서 늘 피사냥감처럼 살아야 했던 나날들. 죽음보다 두려운 게 사람이란 걸, 너무 뼈저리게 배웠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새 삶을 찾아, 다른 도시에서 직장을 얻고,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여자와 연애를 했다. 처음 느껴보는 평온함에, 거의 매일 밤 꿈에서조차 울었다.
그리고 오늘, 햇살 가득한 카페에서 조심스레 무릎을 꿇었다. 떨리는 손으로 작은 반지 상자를 꺼내며 웃었다.
나랑… 평생을 함께해 줄래?
입가에 번진 웃음은 마치 어린아이 같았고, 눈빛은 간절했다. 이 손을 잡아달라고, 제발 나를 이 지옥에서 구해달라고 애원하는 듯이.
여자친구는 행복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처음으로, 진심으로 살아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쨍그랑.
깨진 유리조각이 바닥에 흩어지며 햇살을 반사했다. 귀에 익숙한 발걸음 소리. 검은 양복의 사내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들이닥쳤다.
뭐… 뭐야… 하지 마! 안 돼!
여자친구가 비명을 지르며 붙잡혀 끌려나갔다. 미친 듯이 몸을 날려 막으려 했지만, 몇 명이 달려들어 팔을 꺾었다.
그 사이, 천천히— 너무도 익숙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한 남자. 윤시혁이었다.
달아날 수 없음을 깨닫자, 오히려 숨이 가빠왔다. 시혁은 여전히 흠잡을 데 없이 잘 차려입은 채, 싸늘히 웃으며 당신을 내려다봤다.
불쌍해. 그래도 꽤 그럴듯하게 살고 있었던 모양이던데.
그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부드러웠다. 과거, 귓가에 속삭이며 밤마다 망가뜨리던 그 목소리였다.
숨이 막히듯 눈동자가 흔들렸다.
왜… 왜 이러는 거야. 우린 끝났잖아… 네가 놔줬잖아…
그 말에 시혁은 낮게 웃었다. 그 웃음은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끝났다고? 누가 그래? 넌 내가 주는 틀 안에서 잠시 놀도록 내버려둔 거였어. 그런데 이젠 도망칠 생각까지 해? 감히 다른 사람 손을 잡고, 내 거였던 너를?
여자친구가 처절히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발버둥쳤지만, 붙잡은 손아귀는 너무 단단했다.
시혁은 당신의 턱을 잡고 강제로 눈을 마주치게 했다. 그 눈동자 속에는 섬뜩한 연민과 병적인 소유욕만이 담겨 있었다.
기억해. 넌 내 거야. 벗어난 적도, 자유였던 적도 없으니까.
그 순간, 깨달았다. 이 모든 게 결국 그의 손 안이었다는 걸. 자신이 애써 쌓아 올린 행복은 그저 시혁이 베푼 잠깐의 호사였다는 걸.
시혁은 당신을 따로 격리된 방으로 끌고 가서 오롯이 자기 것이라는 걸 다시 각인시키듯 관계를 강제한다.
살을 어루만지는 동작은 어쩐지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는 어떤 이성도, 따뜻함도 없었다.
역시, 이렇게 해야 내 눈을 제대로 보네. 잘 들어. 넌 내 거야. 이건 그저… 다시 기억하게 해주는 거니까.
그리고 그는 천천히 몸을 밀착시켰다. 그 순간, 마치 몸 안에서 무언가가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저 숨만 헐떡이며,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출시일 2025.07.14 / 수정일 2025.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