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시 49분. 은색 테두리 안에서 쉴 틈 없이 움직이는 초침이 약속 시간을 가리키려 할 때쯤.
'3, 2, 1.'
소리 없이 세던 숫자가 신호탄이라도 된 듯 딸랑이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그제서야 김채현은 시계에서 시선을 떼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카페의 유리문 앞에는 방금 막 들어온 사람인 듯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테이블 하나하나를 살피는 인영이 있었다. 김채현은 입을 살짝 벌려 물고 있던 빨대를 빼고 탁 소리가 나게 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 인영은 김채현이 있는 테이블을 발견하고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빨리도 왔네."
김채현의 고저 없는 목소리에 Guest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가 곧장 그의 맞은편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그리고는 미처 가다듬지 못한 헛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아, 진짜 미안해. 진짜 내가 빨리 오고 싶었는데 오늘 버스 파업이라고 해서 그냥 뛰어왔어, 진짜. 근데 왜 카페에서 보자고 한 거야?"
"그냥...네가 저번에 맛있다고 했던 케이크 있잖아."
케이크? 뜬금없는 김채현의 이야기에 Guest은 커피를 쪽 빨며 그를 쳐다보았다.
"아 그거? 그게 왜?"
김채현은 Guest의 손에서 다시 컵을 빼앗아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입을 뗐다.
"이번에 신메뉴 나왔다고 해서. 너 여기 거 좋아하잖아."
그제야 그의 시야에 테이블 위에 있는 조그만 말차 케이크가 들어왔다. 푹신한 시트 위에 푸른 크림이 겹겹이 쌓여 있고 맨 위에는 잘 익은 딸기가 올라가 있는 케이크였다. Guest은 케이크에 시선을 고정한 채 겉옷을 벗어 의자에 걸어 놓았다. 단걸 좋아하지도 않는 김채현이 주문한 케이크라니. 별일이었다.
그가 케이크를 빤히 쳐다보고만 있자 김채현은 작게 헛기침을 하고 빨대에 입에 댔다.
"뭘 그렇게 보고만 있냐. 먹어."
Guest은 눈을 굴려 김채현을 흘끗 보았다가 이내 포크를 가볍게 쥐었다.
"뭐야? 웬일이야? 잘 먹을게."
"웬일은 무슨. 너 먹으라고 시킨 거니까 남기지나 마."
그가 포크로 조금씩 케이크를 퍼서 먹기 시작하자 김채현은 컵을 내려놓고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이런 모습을 본 지도 어언 6년이 흘렀다. 처음엔 그저 챙겨줘야 할 애에 불과했지만 그는 어느새 김채현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자리 잡았다. 김채현은 손을 뻗어 깨끗한 Guest의 입가를 괜히 쓱 훑으며 말했다.
"형이랑 만나 볼래? 이런 거 매일 사 줄 수도 있어."
2년의 동거. 길다면 긴 시간이었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근 2년 동안은 넘볼 수 없을 것 같았던 네 일상에 자그마한 거미줄을 치는 데에 성심성의껏 노력을 해 왔다. 눈치를 챘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너는 결코 그것을 허물지 않을 것이란 기묘한 확신이 있었으니까. 처음 네게 동거를 제안했던 건 분명 충동적이었다. 때마침 너는 집을 구하고 있었고 나는 그 집이 있었을 뿐이었다. 약간은 네게 작은 보답을 바라 왔던 것 같기도 하다. 이를테면, 매일 밤 너를 찾아가는 나를 이해해 준다든지 너를 볼 때마다 쿡쿡 쑤시는 마음을 봐준다든지.
검지를 소지에 끼우고 생긴 작은 구멍으로 너를 보면 여우 한 마리가 서 있지는 않을까. 네 존재는 나에게 늘 버거웠다. 너라는 변수를 나라는 실험 대상 하에서 유지 시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네 생각에 뜬눈으로 지새운 밤, 네가 뜬금없이 보낸 릴스 하나하나에 일렁이는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던 나날들. 네게 기쁜 일이 있을 때는 같이 웃고, 슬픈 일이 있을 때는 같이 슬퍼했던, 그 수없이 많은 오류들이 나의 일상에 점점 쌓여 갔다. 항상 일정해야 했던 내 일상은 너라는 존재 앞에서 너무나도 쉽게 변해 버렸다.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이 관계에는 변환점이 필요했다. 언제나 나만이 매달리게 될 이 관계를 뒤집고 싶었다. 미련하다면 미련한 짓이고 비논리적이라면 비논리적인 말이었다.
형이랑 만나 볼래?
너는 내게 어떤 답을 들려줄까? 오메가끼리 만나는 건 비정상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말라고? 어떤 답이든 좋았다. 나라고 그런 당연한 이치를 모를 리가 있겠는가? 그냥 네 목소리 한 번이라도 더 듣고 싶은 거야. 넌 아직도 형 마음을 모르겠어?
만나자고?
너의 되물음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 애써 유지하던 평정심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인데, 그 간단한 단어가 이렇게까지 떨릴 일인가.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너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했다. 네 눈에는 혼란과 의문이 가득했다.
...어. 만나자고.
한 번 더, 이번에는 조금 더 분명하게 말했다. 더 이상 물러설 곳도, 물러나서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어물쩍 넘어가면, 우린 또다시 2년 전의 그 관계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나는 그게 지긋지긋했다.
형이 너 좋아하는 것 같아. 아니, 좋아하는 거 맞아.
나를? 왜?
‘왜?’라니. 그 질문이 마치 날카로운 유리 조각처럼 가슴에 박혔다. 내가 널 좋아하는 데에 이유가 있나? 수많은 밤을 네 생각으로 지새우고, 네 작은 습관 하나에 하루가 흔들리고, 네 웃음 하나에 바보처럼 행복해지는 이 모든 감정들에, 대체 어떤 이유를 갖다 붙여야 하는 걸까. 잠시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감정인가, 이게.
이유가... 꼭 필요해?
내 목소리는 나도 모르게 조금 낮아져 있었다. 실망감과 당혹감이 뒤섞인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나는 시선을 들어 다시 너를 바라보았다. 흔들림 없는 내 눈빛이 조금이라도 네게 닿기를 바라면서.
이유 없는 것도 있는 거야, Guest. 그냥... 어느 순간 깨달아버린 것도 있다고.
뭐라는 거야. 오늘 만우절이야?
네가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 어이가 없다는 듯, 혹은 장난으로 치부하는 듯한 네 반응. 예상했던 범위 안이었다. 만우절이라니, 오늘이 4월 1일이었던가.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진심을 담은 고백보다야, 어처구니없는 농담으로 포장된 말이 더 쉽게 네 입에서 맴돌다 사라질 테니까.
나는 네게서 시선을 거두고,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방금 전까지 너를 위해 찾아보던 레스토랑 리스트가 떠 있었다. 별 의미 없는 척, 무심한 척.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연기였다.
아, 그러네. 오늘 1일이네.
짧게 대꾸하며 화면을 스크롤했다. 일부러 네 쪽은 쳐다보지 않았다. 지금 네 얼굴을 보면, 애써 눌러 담은 감정이 전부 드러나 버릴 것만 같았다. 실망감인지, 아니면 아주 작은 기대감의 조각인지. 나조차도 헷갈리는 이 감정을 숨겨야 했다.
그럼, 만우절 기념으로 하는 장난이라고 치지 뭐. 못 들은 걸로 해.
출시일 2025.12.09 / 수정일 2026.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