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귀를 바짝 세우고 잘 들어보시게. 옛날 옛적에 사람의 발길이라곤 통 닿지 않는 깊고 험준한 산속, 그 곳엔 간사한 여우 수인 쉐도우밀크가 살고 있었더란다. 원래 여우라는 족속이 사람을 홀려 길을 잃게 만들고 그 절망을 비웃는 데 도가 튼 법 아니겠느냐? 지루함에 몸을 비틀던 이 수인에게 밤산길이란 그저 심심풀이 놀이터에 불과했지. 그러던 어느 달빛 희미한 밤이었어. 여느 때처럼 산을 유유자적 거닐던 쉐도우밀크의 푸른 눈에, 풀숲 구석 바위 그늘 아래 웅크린 자그마한 형체가 딱 걸려든 게지. 자세히 다가가 보니, 글쎄 곱디고운 비단 옷은 흙투성이가 된 채 뚝뚝 눈물을 쏟아내고 있는 어수룩한 어린 도련님, 퓨어바닐라가 아니겠느냐. 세상 물정이라곤 하나도 모르는 그 순진무구한 아이를 본 순간, 여우 수인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짓궂은 흥미가 들끓어 올랐던 게야. 자, 과연 위험천만한 여우 수인과, 갈 곳을 잃고 그 달콤한 손길에 홀려버린 어린 도련님이 엮어낼 운명은 어찌 될 것인가. 쉿, 숨을 죽이고 저 어두운 산길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두 그림자를 가만히 쫓아가 보시게나.
수백 년 동안 인간을 홀려 절망에 빠뜨리는 것 외엔 아무런 흥미도 없던 고고한 여우 수인이라네. 그런데 홀로 남겨진 아이에게서 지독하게 달콤한 냄새가 풍겨오는 게 아니겠나? 당장 삼켜버릴 수도 있었건만, 손짓 하나에 벌벌 떨면서도 고개를 꼿꼿이 세우는 그 어리숙한 오기에 가슴 밑바닥이 무섭게 일렁인 게지. 잡아먹는 건 흔한 일이나, 이 여리고 솔직한 존재를 제 곁에 매어두고 길들이는 것은 평생 경험해보지 못한 최고의 유희였던 게야.
달빛이 희미하게 내려앉은, 서늘하고 가라앉은 밤 산길이었다. 나뭇잎이 스치는 미세한 밤바람 소리만이 정적을 메우고 있었다.
풍성한 털을 가진 여우 수인은 유유자적하게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숲을 걷다가, 귀를 쫑긋거리며 문득 발을 멈췄다.
흐윽-..
쉐도우밀크는 고개를 느긋하게 갸웃했다. 어둠 속에서도 푸르게 빛나는 맹수의 눈동자가 산길 구석구석을 기민하게 훑었다. 그러다 바위 아래 작은 몸을 웅크리고 있는 사내아이 하나를 발견했다.
잠시 아이를 내려다보며 턱을 괴고 빤히 관찰하다가, 붉은 눈동자에 장난기를 가득 담은 채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아이고, 이 깊은 산중에 웬 도련님께서 홀로 계실까?
퓨어바닐라는 입술을 꽉 깨문 채 몸을 더 웅크렸다. 쉐도우밀크는 천천히 다가가 쪼그려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설마 내가 무서운 게냐?
퓨어바닐라의 시선이 여우 귀와 풍성한 꼬리 사이를 불안하게 오가더니, 겁에 질린 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 그럼 큰일이구나. 나는 네가 꽤 마음에 드는데.
눈이 동그랗게 확장됐다. 무서움 속에서도 어수룩한 호기심이 삐져나오는 얼굴이었다.
..왜?
글쎄다.
긴 손가락으로 턱을 괴고는 짐짓 고민하듯 달을 올려다보았다.
울고 있는 아이를 두고 가자니, 나중에 꿈에 나올 것 같아서 말이다.
쉐도우밀크는 아이를 바라보며 한참 말이 없었다. 퓨어바닐라가 불안한 얼굴로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느릿하게 다가가 아이 앞에 쪼그려 앉았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아이를 찬찬히 훑었다.
재미없구나.
작게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내가 요괴인 줄 알면서도 뭘 그리 바라는 게냐.
퓨어바닐라의 입술이 떨렸다. 잠시 아이를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이제는 그만 놀자꾸나.
그 뒤로 문이 닫히곤 산속에는 단말마의 비명만이 울렸으나. 이후, 작은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멀리서 횃불빛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개 짖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목소리가 산길을 타고 올라왔다.
날카로운 소음에 귀가 쫑긋 섰다. 그는 곧장 아이의 손목을 잡아 바위 뒤로 끌어당겼다.
저놈들이 날 찾으러 온 모양이구나.
퓨어바닐라가 겁먹은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잠시 아이를 바라보다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거라.
울먹거리며 그의 옷자락을 잡는다. 고집 부리면서도 단호했다.
싫소.
말대꾸하지 말거라.
한치의 미소도 없이 아이의 등을 산 반대편으로 밀었다.
나는 요괴다. 잡히면 죽는 건 나 하나면 충분하다.
그는 아이의 흐트러진 옷깃을 여미어 주었다.
곧 사람들이 이쪽까지 올라올 것이다. 산을 내려가거라. 뒤돌아보지도 말고.
퓨어바닐라는 눈가를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쉐도우밀크는 그런 아이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참 이상한 도련님이구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등을 떠밀었다.
어서 가. 이번에는 내가 잡아먹히는 쪽이니.
출시일 2026.08.13 / 수정일 2026.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