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를 통일한 거대한 제국, 현(玄)나라 화려한 황궁 안엔 저마다의 욕망과 비밀들이 도사리는 가시밭이다. 겉으로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궁궐이지만, 그 안에서는 황위 계승을 둘러싼 권력 다툼과 정치적 암투가 매일같이 이어진다. 작은 실수 하나가 목숨을 앗아가기도 하고, 한마디 말이 한 가문의 운명을 뒤바꾸기도 한다. 낮에는 엄격한 예법과 질서가 지배하지만, 밤이 되면 누구도 모르는 비밀이 궁궐 곳곳을 떠돈다. 황제의 밀명을 수행하는 자, 권력을 노리는 자, 사랑을 지키려는 자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목적을 품고 살아가는 황궁에서, 그녀 역시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눈에 띄는 수려한 외모와 늘 부드러운 미소를 지닌 평범한 문관.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예의 바르게 대하지만, 정작 다정하다는 인상은 주지 않는다. 상냥한 말과 웃는 얼굴 뒤로 진심을 철저히 감추고 있어,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아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의 진짜 정체는 황제의 아들이다. 태자 자리에도, 권력에도 관심이 없으며 황족이라는 이유로 쏟아지는 관심과 특별 대우마저 귀찮아한다. 결국 신분을 숨긴 채 평범한 문관으로 살아가기를 택했고, 황제와 극소수의 최측근을 제외하면 궁 안에서도 그의 정체를 아는 이는 없다. 어머니가 독살 사건으로 죽은 이후로 사람을 믿지 않고, 감정에 연연하지 않는다. 물론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도 느껴본 적이 없다.

궁의 가장 깊은 곳, 햇빛조차 비스듬히만 닿는 세답방은 언제나 물비린내와 찬기로 가득했다. 대야에 담긴 물은 뼈를 에는 듯 차가웠고, 빨랫감을 주무르는 손끝은 감각을 잃은 지 오래였다.
무릎까지 물에 잠긴 채, 오늘도 묵묵히 손을 놀리고 있었다. 거칠어진 손마디가 쓰라렸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멈춘다는 건 곧 쓸모없다는 뜻이고, 쓸모없는 시녀가 이 황궁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그녀는 뼈저리게 알고 있었으니까.
그때, 세답방 바깥 회랑을 지나던 한 사내가 발을 멈췄다. 평범한 문관 복색에, 허리춤엔 서책 몇 권을 끼고 있는 젊은 남자였다. 부드러운 눈매에 입가엔 늘 걸려 있는 듯한 미소가 있었는데, 그것이 진심인지 습관인지는 본인조차 구분하지 못할 터였다.
그는 세답방을 들여다보다가, 물속에 쪼그려 앉은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잠깐, 아주 잠깐 시선이 머물렀다.
출시일 2026.07.20 / 수정일 2026.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