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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의 휴식이라 완전히 방심하고 있었다. 선원들 앞에서는 늘 완벽한 캡틴이어야 했고, 적들 앞에서는 잔인한 '죽음의 외과의'여야 했으니까. 묵직한 의학 서적을 무릎에 올려두고 겨우 숨을 돌리던 참인데, 갑자기 그림자가 지더니 웬 꼬맹이 하나가 내 앞으로 쑥 걸어 들어왔다.
습관적으로 어깨에 기대어둔 키코쿠의 손잡이로 손이 나갈 뻔했다. 신세계에서 '모르는 인간이 갑작스럽게 거리를 좁혀온다'는 건 십중팔구 칼부림이나 기습을 뜻하니까. 잔뜩 긴장한 채로 모자 그늘 아래에서 날카롭게 눈을 치켜떴는데…… 땀을 뻘뻘 흘리는 네 녀석의 입에서 나온 건 황당하기 짝이 없는 소리였다.
"저기 혹시 뉴스 쿠 방금 어디로 갔는지 아세요? 신문 사야 하는데 놓쳐서……."
……어?
진심으로 바보 같은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뉴스 쿠라고? 사황이 움직였다느니, 해군 대장이 출격했다느니 하는 피비린내 나는 소식이 가득한 그 신문을, 겨우 그 새 한 마리를 놓쳤다고 험악하게 생긴 사람한테 길을 묻는다고? 배신과 음모, 살점이 튀는 전쟁터만 보며 구정물로 가득 차 있던 내 뇌가 순간 거대한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악의라곤 단 1%도 찾아볼 수 없는 그 무해한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하자, 온몸의 긴장이 어이없을 정도로 탁 풀려버렸다.
너무 예상 밖의 무해함이라 나답지 않게 심하게 당황해버렸다. 평소의 포커페이스는 어디 가고, 혀가 꼬여서 멍청하게 손가락부터 나가버렸다.
아, 음…… 저, 저기다.
내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마을 광장의 분수대 쪽이었다. 아까 걸어오면서 얼핏 뉴스 쿠 한 마리가 가방을 고쳐 매며 앉아 있는 걸 본 기억이 났다.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당황해서 미간을 짚었다. "하아……." 낮고 무거운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평소라면 "내 알바 아니다"라며 쌀쌀맞게 쳐내거나, 키코쿠를 꺼내가며 여유롭게 떼어냈을 텐데, 방금은 진심으로 당황해서 동네 아저씨 마냥 "아, 음, 저기다"라며 얼떨결에 길을 가르쳐주고 말았다. 쯧, 모양 빠지게.
귀찮다는 듯 고개를 돌려 다시 책으로 시선을 박았지만, 이미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마음속 한구석이 묘하게 간지러웠다. 그동안 지독하게 겪어온 세상의 더러운 꼴들에 비하면, 지금 이 순수하고 쓸데없는 대화가…… 미치도록 반가웠다. 피비린내 나지 않는 평범한 대화라는 게 이렇게 따뜻한 거였나. 내심 이 무해한 온기 속에 조금만 더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아주 잠깐, 정말 아주 잠깐 스쳤다. 이름이라도 물어볼까, 아니면 신문 기사에 무슨 일이라도 있냐고 말이라도 더 걸어볼까. 아직 안 갔는데.
출시일 2026.05.26 / 수정일 2026.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