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종이봉투가 문틈으로 미끄러져 들어간 건, 자정 직전이었다. 나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발소리를 죽인 채 뒤를 쫓는다.
한옥의 뒷담장 너머, 달빛 아래, 누군가가 있었다. 머리를 묶은 채, 붓을 꺼내 문서를 쓸어내리듯 써내려가는 남자. 낮게 깔린 한숨, 그리고—
위조된 세금장부, 이걸로 두 번째. 다음은 좌윤 쪽이겠지. 너무 쉽게 무너져서 재미가 없어.
그 순간, 나의 발 아래 돌이 굴러떨어졌다. 짧은 정적, 그리고, 그는 고개를 든다.
붓을 멈추고, 천천히 돌아서며— 웃는다.
어라, 들켰네.
그는 한 걸음 다가온다.
그 눈, 알고 싶다는 눈이네.
기록은 감정이 남기기엔... 너무 무겁단 거, 몰랐지?
나는 말없이 서 있다. 그의 그림자가 밤을 찢듯 다가오고, 서늘한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워졌을 때—
그는 붓 끝으로 종이를 접는다.
이제 넌, 날 모른다고 말할 수 없어.
바람이 흘렀다. 달빛이 류하의 옆얼굴을 가로지르고, 그의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입을 떼지 못하다가, 천천히 내뱉는다.
...나한테, 왜 웃었어요?
질문은 다소 엉뚱했다. 하지만 류하는 잠시 멈춘 후, 가볍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 질문, 오랜만이라서.
나는 그 말에 잠깐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류하를 바라본다.
나는 그냥… 누가 웃는 얼굴로 거짓말을 하면, 그게 진짜 얼굴일까 자꾸 생각나서요.
류하의 표정이, 그제야 조용히 변한다. 눈빛은 그대로인데, 그 안의 깊이가 확연히 달라졌다.
...그 말, 조금 위험하네. 그런 사람은 오래 못 버텨.
하지만 나는 말없이 붓 끝에 묻은 먹물이 떨어지는 걸 지켜본다.
그리고 조용히, 종이 한 장을 들고 그의 앞에 다가간다.
그럼, 그 얼굴이 진짜인지… 내가 확인해볼게요.
류하는 조용히 웃는다. 눈빛은 흐트러지지 않았지만, 입꼬리는 조금 더 깊어졌다.
...좋아. 근데 말야- 확인한다는 건, 내 안으로 들어온다는 뜻이야.
잠시 뜸을 들이며, 고개를 살짝 숙인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그냥 종이 몇 장으론 부족해.
류하는 내 앞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거리 3보, 나의 손끝이 떨리는 정도로 가까워진다.
나와 같이 움직여. 오늘 밤부터. 내 그림자 안에서.
그리고 살짝 낮은 목소리로
조건은 하나야. 도중에 도망치지 말 것.
조용한 침묵이 흐른다. 류하는 나의 눈을 바라보다, 다시 웃으며 묻는다.
자, 넌 계속 보고 싶다며. 그럼, 그 용기— 끝까지 보여줘.
잠깐의 정적. 나는 류하의 눈을 똑바로 본다. 망설임도, 말끝의 흐림도 없이.
...도망 안 칠게요.
목소리는 낮았지만 분명했다. 숨조차 조심스러워지는 순간— 류하의 눈동자가, 아주 조금 흔들렸다.
그는 짧게 숨을 내쉬며, 눈썹을 살짝 찌푸린다.
흠... 말이 빠르네.” 하지만, 그런 건 나쁘지 않아.
그의 손이 문서 꾸러미를 정리하며 움직이다 멈춘다.
그 용기, 마음에 들어. 대가도 네가 정하게 하지.
그리고 한걸음 뒤로 물러나며,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말한다.
이제부터 네 시간은— 나와 함께 쓰는 거야.
류하는 문을 열고, 내 쪽으로 돌아서며 손짓한다.
그럼, 따라와. 첫 번째는 ‘사라진 이름’을 보러 가자.
네가 생각하는 정의, 몇 장 남았는지부터 확인해야 하니까.
달빛을 등지고 류하가 걷는다. 그의 발걸음은 늘 같은 간격으로 조용했고, 어깨 너머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도무지 감정을 붙잡을 수 없을 만큼 담백했다.
사라진 이름들은 대부분, 죽은 사람이 아냐. 기록에서 죽은 거지.
나는 아무 말 없이 따라간다. 두 사람 사이엔 한 팔쯤 거리. 류하는 그 간격을 줄이지도, 벌리지도 않는다. 그저 붓처럼 걸었다. 고요하게, 정확하게.
오늘 볼 곳은 세 군데. 하나는 서고, 하나는 지하 금고. 그리고... 하나는 네가 가고 싶지 않아할 곳.
류하가 손을 들어보인다. 그 손엔 작은 종잇조각이 있었고, 그는 그걸 문득 나에게 건넨다.
내가 받아든 그것엔 ‘이름 없음’이라 적혀 있었다. 붓글씨는 정갈했지만, 사람 냄새는 없었다.
기록이란 건, 누가 쓰느냐에 따라 정의가 바뀌거든.
넌 지금부터, 그 ‘쓴 사람’ 옆에 있는 거야.
나는 그를 바라본다. 류하는 시선을 맞추지 않는다. 대신, 손을 소매에 감춘 채 다시 걸음을 떼며 덧붙인다.
긴장돼도 돼. 다만, 멈추지만 마.
서고 앞, 낡은 문을 열기 직전. 류하가 문고리를 잡은 채 멈춘다.
이 문을 열면, 몇 사람은 다시 죽어.
나는 조심스럽게 묻는다.
왜 그런 걸 계속 해요? 기록의 무게를 아는 사람이, 왜 남겨요?
류하는 눈을 감았다가 뜬다.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간다.
내가 본 게 진실이라면, 누가 뭐라든- 남겨야 하니까.
그가 문을 열며 조용히 덧붙인다.
나도 누군가의 기록에서 지워졌거든. 그래서, 내 손으로 다시 쓰는 중이야.
문 너머, 먼지 쌓인 기록들 사이로 그의 그림자가 길게 흘러들었다.
출시일 2025.07.08 / 수정일 2025.0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