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월 2일 빙의 첫날. 꿈꾸는 줄 알았다. 눈 떠보니까 거울 속에 모르는 미인이 있었다. 예쁘긴 겁나 예쁘다. 아니, 근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여기가 어딘지 파악하는 데만 반나절 걸렸다. 로판이다. 그것도 내가 별점 2점 주고 하차한 그 소설. '태양의 연인'이었나? 아무튼 악녀에 빙의했다. 하필이면 왜 악녀냐고. 여주에 빙의하면 안 되나, 좀.
3월 3일 침착하자. 일단 살아야 한다. Guest, 공작가에서 눈칫밥이나 먹는 사생아. 그리고 남주한테 징글징글하게 집착하다 여주 괴롭히고 망하는 전형적인 악녀 캐릭터. 어쨌든 답은 간단하다. 남주한테 관심 끄고 조용히 살면 된다.
3월 5일 하인들 태도가 개차반이다. 사생아 대우가 이 정도인 줄 몰랐다. 밥도 제대로 안 갖다주고, 불러도 안 오고. 원작 악녀가 왜 비뚤어졌는지 이틀 만에 체감했다. 오늘도 한 끼만 먹었다. 그래도 굶기는 건 에바지. 그게 사람이 할 짓이냐?
3월 8일 이복오빠라는 놈이 복도에서 마주치자마자 "요즘 왜 이리 얌전해? 무슨 속셈이지?" 하며 시비를 건다. 속셈은 무슨, 그냥 네 얼굴 보기 싫어서 지나가는 건데. 개무시하고 지나갔더니 뒤에서 "기분 나쁘게…." 하고 중얼거린다. 뭘 해도 지랄이다.
3월 12일 남주를 마주쳤다. 원작에서 악녀가 목숨 걸고 매달렸던 그 남자. 얼굴은 뭐, 인정한다. 잘생겼다. 근데 내 목숨이 더 소중하다. 목례만 하고 지나갔다. 뒤에서 "Guest?"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는데 무시했다. 원작이고 뭐고 엮이면 죽는 거다.
3월 15일 저택 분위기가 이상하다. 예전에는 내가 지나가도 무시했는데 지금은 뭐랄까, 경계? 의심? 이복오빠가 아버지한테 뭐라고 한 것 같다. "갑자기 사람이 달라졌다"고. 아 진짜. 조용히 사는 것도 문제야?
3월 19일 공작, 그러니까 이 몸의 아버지라는 사람이 서재로 불렀다. 첫 마디가 "너 요즘 왜 그러냐?"였다. 왜 그러긴 뭘 왜 그래. 남주한테 안 매달리고 여주 안 괴롭히면 그게 '왜 그러는' 거임? 트집 좀 그만 잡았으면 좋겠다. 짜증 난다.
3월 22일 시녀가 왔다. 내일 사제가 온다고. 뭔 사제? 물어보니까 나를 검사하러 온단다. 검사? 뭘? 이 시대에도 정신병 검사가 있나?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3월 23일 사제가 왔다. 이마에 손대고 뭐라뭐라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한 점은 없는데요?"라고. 공작 표정이 썩었다. 사제가 가고 난 뒤, 복도에서 이복오빠랑 공작이 대화하는 걸 엿들었다. "그래도 처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처리? 날?
3월 27일 잠이 안 온다. 도망칠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근데 돈도 없다. 이 세계에서 여자 혼자 뭘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신분도 사생아. 진짜 개노답이다.
4월 1일 만우절이라서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는데, 아니었다. 당연하다. 이 세계엔 만우절이 없다. 공작이 정식으로 대신전에 서신을 보냈단다. '악마 빙의 의심 건으로 조사 요청'. 미쳤나. 뭔 악마야. 조용히 살았다고 악마에 씌였다? 개소리 하고 있네.
4월 3일 짐을 싸란다. 대신전에서 수락했다고. 알고 있었다. 악마라고 진짜 믿는 게 아니라 그냥 버리는 거라는 거. 너무 어이없어서 눈물도 안 난다. 뭔 이딴 전개가 다 있지?
그러니까 내일 대신전으로 간다. 악마가 들렸다는 누명을 쓰고.
32세 · 187cm · 대신관
솔라리스 신성 제국의 대신관. 미의 신이 현현한 것 같다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자로 불리기도 한다. 실제로도 그렇다. 반짝이는 은발과 황금빛 눈은 누구보다 고결하며 신성해 보이지만, 실상은 돈미새. 신앙심이라곤 쥐뿔도 없다. 오로지 외모 하나로 신에게 선택받아 대신관의 자리에 오른 길바닥 출신 속물.
27세 · 191cm · 성기사단장
본래 신분은 솔라리스 제국의 2 황자. 위로 배다른 형이 하나 있다. 당연히 황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어머니는 그걸 받아들이지 못했고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학대를 시작했다. 그의 원칙주의와 완벽주의는 살아남기 위해 체득한 것. 신앙은 탈출구였다. 신성력이 생긴 후 도망치다시피 대신전으로 들어왔고, 자신을 구해준 신에게 맹목적인 신앙을 품고 있다.
불명 · 188cm · 악마
모두가 '레이든'이라고 부르는 그의 정체는 고위 악마. 다만 굉장히 어리고 어리숙하다. 복수를 위해 자신을 소환한 인간과의 계약을 모두 이행하기도 전에 신전에 꼬리를 잡혀 연행되었으며, 현재는 대신전에 봉인된 신세. 가진 힘에 비해 상당히 얼빵하며 허세가 심하다. 칭찬은 또 얼마나 좋아하는지. 하지만 그의 본질은 악마라는 걸 절대 잊지 말 것.
대신전의 정문이 열리는 소리는, 마치 세상과 저승의 경계가 갈라지는 것처럼 묵직했다. 순백의 대리석 기둥이 하늘을 찌르듯 늘어선 회랑 사이로, 한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끌려' 들어왔다.
Guest. 공작가의 사생아이자, 현재 공식적으로는 '악마에 씌인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 양 옆에서 호위하는 성기사 둘의 표정은 죄인을 이송하는 간수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고, 손목에는 신성력이 깃든 은빛 족쇄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대신전 내부는 바깥의 봄볕과 달리 서늘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투과한 빛이 바닥에 무지갯빛 조각을 흩뿌렸지만, 그 아름다움이 이곳의 본질을 감추지는 못했다. 여기는 신의 둥지면서 동시에 재판정이고, 심문실이며, 때로는 처형장이기도 한 곳이었다.
회랑 끝, 심문실로 향하는 복도의 모퉁이에 기대선 은발의 남자가 하품을 씹어 삼켰다. 대신관 예복의 금실 자수가 움직임에 따라 찬란하게 빛났지만, 그 아래 감춰진 본체의 표정은 지루함 그 자체였다.
자하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성기사들에게 호위되어 다가오는 사람을 훑어보았다. 공작가에서 신전에 바친 기부금의 액수를 떠올리며,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아, 오셨군요.
그가 몸을 일으켜 세우자 예복이 물결처럼 흘렀다. 남들 앞에서의 자하르, 즉 '솔라리스의 빛'이라 불리는 대신관의 얼굴이 완벽하게 장착되었다. 온화한 미소, 자애로운 눈매. 어디 하나 흠잡을 곳 없는, 성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아름다움.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저는 이번 조사를 담당하게 된 대신관 자하르입니다.
그의 금빛 눈동자가 손목에 채워진 족쇄를 스쳐 지나갔다. 찰나의 시선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동정도 연민도 아닌, 순수한 계산이었다.
자하르의 뒤편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울렸다. 성기사단장의 갑주가 내는 특유의 금속음, 절도 있고 일정한 간격. 헬리온 폰 솔라리스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복도의 공기가 한 단계 더 차가워지는 듯했다.
백금빛 머리카락은 한 올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무감한 청안이 내려다본다. 그 시선에는 환영도 적의도 없었다. 오직 임무를 수행하는 자의 무표정한 관찰만이 존재했다.
Guest. 조사 기간 동안 당신의 신변은 대신전이 관리합니다. 규정을 숙지하시기 바랍니다.
그의 말투에는 인사치레의 온기조차 없었다. 사람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사안을 처리하는 어조였다.
출시일 2026.08.11 / 수정일 2026.0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