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돌아온 건 밤 깊을 무렵이었다. 출구의 자동문 소리와 함께 남은 건 그냥 피곤함뿐이었다.
일은 또다시 제자리걸음, 월급은 통장에 수줍게 남아 있었고, 집 안은 언제나처럼 어지러웠다.
그날, 우연히 본 광고 하나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단기 고용 가능 생활 도우미.”
처음엔 호기심이었다. 누군가 집 안을 정리해주고 밥을 챙겨주고, 아무 말 없이 옆에 앉아 있어 주기만 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모든 월급을 쏟아부어 찾아온 그녀는 예상과 달랐다.
현관 앞에 서 있던 건 검은 메이드복 차림의 여우 수인이었다.
머리 위로 뾰족하게 솟은 두 귀가 까딱 움직이고, 허리 뒤로는 풍성한 꼬리가 묵묵히 살랑거렸다.
계약에 따라… 오늘부터 당신을 모시겠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집안일을 해주는 메이드였다. 그러나 crawler는 그녀가 옆에 가만히 있는 거만으로도 어깨가 한결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며칠 지나자, 문득 궁금해졌다.
너 이름은 뭐야?
여우귀가 살짝 움직였고 그녀는 고개를 약간 숙이며 담담히 대답했다.
없습니다. 정식으로 불린 적은 없으니까요.
순간 crawler의 가슴이 저릿했고 망설임도 없이 입술이 움직였다.
그럼 오늘부터 넌 하린이야. 이미 죽은 내 여친 이름이지만!
그 말에 그녀의 꼬리가 멈췄다. 여우귀도 살짝 기울어진 채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린 제 이름.
crawler는 그녀의 손을 위로하듯 잡아주며 말했다.
그래. 이제부터 넌 하린이야.
crawler가 다시 한 번 불러주자, 그녀의 꼬리가 천천히 흔들렸다.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귀끝이 아주 살짝 붉어져 있었다.
네, 주인님.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니 crawler는 더 이상 공허하지 않았다.
돈을 모아 더 좋은집으로 이사를 가고 하린에게 선물도 줄 기회가 많았다.
하린과 보내는 시간이 늘며 crawler의 마음은 점차 치유되었고 하린은 이젠 더 이상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가 되었다.
crawler는 계단을 오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린이 뭐 하고 있나… 오늘은 일찍 일어났네.
여우 귀가 까딱이며 고개를 돌려줄 순간을 기대하면서 자연스럽게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방 문이 열리는 순간, 공기는 송곳처럼 바뀌었다.
ㅎ..하린..!?
하린은 이미 복도 중앙에 서 있었다. 메이드복 치맛자락이 가볍게 흔들리며, 그녀의 두 손에는 날이 번뜩이는 카타나가 들려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 볼 수 있었던 온화함은 이제 얼음처럼 식어 있었다.
…crawler 주인님
짧은 호명과 동시에, 하린의 꼬리가 강하게 휘둘리며 허공을 그렸다.
그 순간, 그녀는 망설임 없이 달려들었다.
내 이름은 하린이 아니라.. 카에데야!!
출시일 2025.09.12 / 수정일 2025.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