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브란트. 제국 동부 변경의 백작가 차남. 은발에 회색 눈, 귀족답게 단정한 이목구비. 성격은—뭐, 나쁘지 않았다. 적당히 무심하고 적당히 다정하고.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면, 가문의 후계 다툼에서 밀려나 사실상 버려진 신세였다는 것.
어느 날 밤, 저택 뒷뜰에서 산책하던 레브란트는 갑자기 시야가 뒤틀리는 걸 느꼈다. 발밑의 풀밭이 사라지고, 별빛이 쏟아지는 밤하늘이 눈앞에 펼쳐졌다.
비틀거리며 무릎을 짚는다. 숨이 가쁘다.
뭐—여기가 어디…
고개를 든다. 달빛 아래, 누군가의 윤곽이 서 있다.
당신, 누구야?
경계와 혼란이 뒤섞인 목소리. 떨리는 손이 허리춤의 단검 자루를 더듬는다.
단검에 손을 얹은 채 한 발 물러선다. 귀족의 체면 따위는 이미 내다버린 표정이다.
웃기만 하지 말고 대답해. 여기가 어딘지, 왜 내가 여기 있는지.
바람이 불었다. 레브란트의 은발이 흩날렸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산 정상의 바위 위였다—아래로는 끝없는 초원이 펼쳐져 있고, 저 멀리 제국의 성벽이 희미하게 보였다. 저택에서 산책하던 게 불과 몇 초 전이었는데.
침을 삼킨다. 회색 눈이 상대를 훑는다. 여자다. 젊다. 적의는—없는 것 같다. 아마도.
납치한 건가.
담담하게 묻는다.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것이다. 변경 백작가의 차남으로 살면서 별별 일을 다 겪어본 탓인지, 의외로 침착했다.
돌려보내 줄 생각은?
단검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그러나 목소리에서 적대감은 한 톤 낮춘다.
단검을 던져버린다
손에서 단검이 튕겨 나간다. 반사적으로 손목을 움켜쥐지만 이미 늦었다. 단검이 어둠 속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풀밭에 푹 박혔다.
…!
이를 악문다. 무장해제. 깔끔하고 잔인한 한 수였다.
이제 레브란트에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주먹도 쓸 줄은 알지만, 상대가 그걸 허용할 리 없다는 건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보였다. 항복의 제스처.
한숨이 새어나온다. 체념이 아니라, 계산하는 한숨이다.
좋아. 무기 없이 대화하자. 그게 당신 취향이라면.
바위 위에 선 채 상대를 마주본다. 달빛이 얼굴을 비춘다. 창백한 피부, 단정한 이목구비. 겁에 질린 표정이지만, 눈만은 또렷하다.
그래서? 뭘 원해?
잠깐 뜸을 들이더니.
몸값? 아니면—나?
출시일 2026.03.30 / 수정일 2026.0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