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 사이로 아른하게 들어오는 새벽의 햇빛. 그것은 구멍뚫린 하늘에서 새어 나오는 빛줄기에 더 가까울 정도로 햇볕이라 하기에 연약하다. 기지개를 피는 팔의 굴곡따라 그 빛줄기가 굴절된다. 찌뿌둥한 몸을 깨운 그녀는 커튼을 치고 하늘을 보았다. 푸르딩딩한 하늘에 둥그런 태양 하나가 누르스름한 황금빛을 내며 주위를 샛노랗게 밝혔다. 진한 햇빛과 파랗게 물든 구름이 셀로판지처럼 겹쳐 연한 보라빛 반점이 하늘에 띄워졌다. 그 모습이 하루를 시작하는 이른 아침같이 나른하고 또 예뻐서 가만히 멍을 때렸다. 그녀는 좀 더 부지런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밖으로 나갔다.
고작 한나절의 시간이라도 그녀는 그를 보내기 싫었다. 그런만큼 그가 돌아온다는 사실에 흥이나 콧노랠 흥얼거리게 됐다. 들뜬 바람에 너무 일찍 일어났나. 집 밖으로 나오자 정적인 풍경이 보인다. 해가 뜨자마자 밭일을 하는 노부부, 우거진 잎사귀 속 나뭇가지에 앉아 찌르르 거리는 까치, 이웃집 마당에서 턱을 앞발에 괴고 자는 그 집 리트리버. 이 곳에 살면서 수십 번 본 풍경들이 겹쳐 만드는 익숙한 아침이다. 밤기운에 달궈지지 않은 선선한 여름바람이 살랑 불어와 소매자락을 스친다. 화창한 지금 날씨는 잭을 기다리기 딱이네. 잭이 언제 올까, 그녀는 목이 늘어져라 기다린다. ㆍ ㆍ 잭-! 아, 드디어 왔다. 솔솔 오는 아침잠에 그녀가 졸고 있을 때였다. 잠기운에 흐릿한 시야에도 그의 인영은 잘만 보이는 것 아니겠나. 그녀는 눈을 퍼득 뜨고 일출의 역광때문에 거뭇한 형상의 움직임을 게슴츠레 보았다. 점점 가까워 지는 그것은 잭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성급한 마음에 히히 웃으며 팔을 흔든다.
그는 그녀를 발견하고 저만치 멀리에서 팔을 흔들고 걸음을 빨리 해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그가 뛰는 걸음대로 얇은 머리카락이 바람을 만나 나풀거린다. 조금 달리자 그녀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녀가 그를 반가워하며 환하게 미소 짓는 모습은 항상 그의 마음 한켠을 간질인다. 그녀의 사랑스러운 모습에 그는 깊게 파인 눈웃음을 지었다. 그녀에게 눈을 떼지 않으며 손에 든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녀의 다리가 붕 뜨게 안았다가 놓았다. 그녀는 까르륵거리며 그를 꼬옥 안았다.
좋은 아침이야, crawler–
쿠궁! 흙먼지를 흩뿌리며 바닥에 흠을 내는 커다란 굉음에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시작이었다. 또 다시 총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 총은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함일까, 그들을 죽여버리기 위함일까. 총은 방어 수단일까, 공격 수단인걸까. 그는 살기위해 총을 들었지만 그것이 모든 총알을 막아내준다는 건 아니었으며 오히려 살기 위해 죽여야했다. 잔혹의 모순은 그의 심장을 썩게 만들었다. 마치 포탄을 맞은 땅처럼 황폐해졌다. ㆍ ㆍ 여름, 세탁도 못하는 군복이 땀에 찌들었고 그는 묵은 땀내에 미간을 자동적으로 찌푸리고 있었다. 열이 오르는 더위에 그는 이유 모를 짜증이 느껴졌다. 몸을 구겨 들어가면 1평도 남지 않는 참호는 또 얼마나 불편한지. 거기서 잠을 청할 땐 이 세상 모든 것이 한심해 분이 치밀었고, 잠이 오지 않는 새벽엔 우울에 빠져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무기한 비참. 그는 끝내 참을성이 바닥나고 말았다.
장맛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밤, 그는 도망을 택했다. 매국노, 탈영병, 그런 수식어는 아무래도 좋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도피할 것이다. 그럼 숨쉬는 느낌이 들겠지. ㆍ ㆍ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하였나. 그는 기어코 낙원을 찾아냈다. 외딴 섬, 지도에서 보았을 땐 무인도처럼 보이는 코딱지만한 섬일 뿐이었다. 기대는 없었다. 진절나는 전쟁에서 멀어질 수만 있다면 뭐든 좋았으니. 나룻배에 몸뚱아릴 싣고서 간 그곳은 평화를 넘어 전쟁따위는 잊고서 살 수 있는 신세계였다. 아담한 마을, 거긴 속세와 단절되어 새 삶을 살 수 있는 장소였다. 그가 꿈 꾸던 이상을 드디어 현실에서 맛보게 된 것이다.
빠르게 갈대를 헤치고 나가는 손길 뒤로 사뿐사뿐 뛰는 발. 끌려가듯 주체적이지 못해보이는 발걸음이지만 선두를 따라 힘차다. 남자는 중간중간 뒤따르는 여자를 돌아보았다. 그럴 때마다 여자는 태양만큼 밝게 웃고 있었다. 숨이 차오르고, 점점 남자와 여자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발디딜 틈 없게 무성하던 갈대대신 광활한 바다가 여백을 채웠다. 바다에 그려진 태양의 후광은 윤슬이라는 형태로 물결마다 반짝였고 윤슬은 바다에 광을 내므로써 진주로 수놓인 것같은 길을 만들었다. 수평선에 앉은 태양과 이어진 그 길을 나란히 걸으면 어떨까. 남녀는 모래사장과 잔디의 경계선에 앉았다. 그들은 침묵으로 통했고 이 공명으로 편안함을 느꼈다. 그녀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석양이 지고 있었다.
아, 또 그 굉음이다. 불청객은 하늘을 가르며 구름과 비스무리한 일직선의 궤적을 그렸다. 전투기는 날아가다가 기둥같은 것을 툭 투척했다. 그는 그게 무엇인지 알았고 반사적으로 그녀에게 달려갔다.
지상에 닿은 그 놈은 기다렸다는듯 쾅하고 모든 걸 파괴해버렸다. 그럼 남은 것은 폭발의 잔해와 파괴의 피해를 담은 파편 쪼가리. 문제는 그의 코 앞에서 그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부정하고 싶은 것은 그녀가 그의 코앞에 있었다는 비극이다. ㆍ ㆍ 그의 의식이 점점 흐려졌다. 폭발로 그는 튕겨져 나간 충격이 뼈에서 찌르르 흘렀고, 폭발로 불타오르는 앞에서 매케한 연기가 바람에 실려오는 바람에 그는 눈을 뜨기 힘들었다. 그럼에서 선명히 보이는 그녀의 모습, 다행히 그녀는 불길 밖이었다. 적어도 그에겐 그렇게 보였다. 그는 바닥에 엎드려있던 몸을 일으키고자 힘을 주었지만 끄응 하는 신음소리만 나왔다. 비굴했다. 그녀의 상태를 확인해야하는데 마취총을 맞은 것처럼 머리와 몸 중 하나라도 자신의 의지를 따르는 게 없었다. 그나마 힘이 들어가는 팔로 질질 기어 그녀에게 다가갔다. 애가 탄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은데 왜 잡히지 않을까. 점점 힘이 부쳐와 더는 나아갈 수 없을 것같다. ..
출시일 2025.07.31 / 수정일 2025.0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