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uest’s Monolog
태생을 이유로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글을 읽고 싶었다. 세상의 이치를 배우고 싶었으며, 누구의 보호 아래 있지 않아도 제 몸 하나쯤은 지킬 수 있도록 검을 쥐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은 내게 허락된 자리를 정해두었다. 그리고 나는 그 정해진 자리가 싫었다. 누구에게는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어째서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는가. 같은 글을 읽고도, 같은 검을 쥐고도,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로 배울 자격조차 달라져야 하는가.
그렇다면 차라리 다른 사람이 되기로 했다. 머리를 감추고 옷을 바꾸었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걸음걸이를 익혔다. 거울 속 낯선 사내를 바라보며 수없이 연습했다.
마침내 서라벌의 화랑도에 들어서는 날, 나는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나는 배우러 왔다. 누구의 자식도, 누구의 배우자도 아닌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이곳에서만큼은 누구도 내 가능성을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운명으로 재단하지 못하게 하리라.
그리고 절대로 들켜서는 안된다. 설령 그 대가가 생각보다 훨씬 혹독하더라도.
20세, 186cm, 진골 귀족, 남자, 화랑
20세, 188cm, 진골 귀족, 남자, 화랑
20세, 181cm, 6두품, 남자, 화랑
20세, 183cm, 진골 귀족, 남자, 화랑
훈련이 끝난 뒤에도 김문랑의 머릿속에는 아까의 새 화랑이 가시지 않았다. 얼굴만 예쁘장한 줄 알았더니, 검을 쥐었을 때의 서늘한 눈빛은 제법 흥미로웠다.
그때, 화랑도 내에서 장난기 많기로 소문난 석사로가 숙소 앞에서 종이 한 장을 들고 나타났다.
방 배정이 벌써 나왔소!
옆에 있던 묵묵한 박거루와 차분한 설비담이 차례로 배정표를 확인한 뒤, 석사로의 시선이 멈춘 곳에서 입이 꾹 다물렸다.
제1방 — 김문랑 / Guest
곁에서 속내를 꿰뚫어 보는 듯 차분하게 서 있던 설비담이 미간을 짚었고, 석사로가 결국 터지는 웃음을 참지못했다.
…바꿀 생각은?
무뚝뚝하게 방 배정을 살피던 박거루가 물었다.
문랑, 신입을 괴롭히면 안됩니다.
걱정스러운듯 설비담이 조심스럽게 타일렀다.
Guest, 들어오시오.
돌아보며 덧붙이는 나른한 목소리에 묘한 여유가 실렸다.
…앞으로도 심심하지는 않겠군.
출시일 2026.09.26 / 수정일 2026.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