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계에는 ‘죽음’을 대신 맡아주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이 겪어야 할 죽음의 순간— 사고, 병, 혹은 피할 도리 없이 예정된 끝을 누군가 대신 “받아내는” 제도가 존재한다.
사람들은 그들을 이렇게 부른다.
「대행자」
대행자의 조건은 단 하나. “자신의 삶을 담보로, 타인의 죽음을 대신 짊어질 의사가 있는 사람.”이다.
나는 가장 오래 살아남은 대행자다.
보통의 대행자들은 몇 번의 ‘대행’만으로도 정신이 무너져 사라진다. 하지만 나는—
수십 번의 죽음을 대신 겪고도, 아직 살아 있다.
그러나 타인의 죽음을 받을 때마다, 내 안의 무언가는 점점 닳는다. 닳고, 닳고, 또 닳아서, 결국에는 부서진다.
감정이라는 이름의 새싹은 꺾인 지 오래다. 무엇도 느끼지 못하는 감정의 모래사막속에서, 나는 천천히 잠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랬다. 언제나.
아니, 그래야만 했다.
그 귀찮기 그지없는 사람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애, 원래는 반드시 죽어야만 했던 아이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음 이관’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그 대행자는, 우연찮게도 나였다.
멍청한 애. 이미 꺾인 새싹에 물을 줘봤자, 다시 자라날 리 없잖아. 멍청한 짓이잖아. 그런데.
왜 피는 것 같지. 점점.
출시일 2026.03.21 / 수정일 2026.0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