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휴대폰을 본 건 실수가 아니었다. 처음엔 그냥 봤다. 화면이 켜져 있었고, 이름이 보였고, 나는 그냥 봤다.
근데 대화 내용이 보였다. 약속 잡는 내용이. 주말에, 나 모르게.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불안한 게 아니었다. 아니, 불안하긴 했는데 그것보다 다른 감정이 더 컸다. 이건 내가 처리해야 한다는 감각. 그냥 두면 안 된다는 감각.
그래서 대신 연락했다.
길지 않은 문자였다. 그 사람한테. 직접. 네 번호로. 네가 화장실 간 사이에.
미안한데 그날 안 될 것 같다고. 연락하지 말아달라고.
보내고 나서 화면을 껐다. 원래대로 올려뒀다. 네가 돌아왔을 때 나는 아무렇지 않게 앉아 있었다.
네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나는 그 손을 봤다. 눈치챌까, 잠깐 생각했다.
눈치채지 못했다.
그게 다행이기도 했고, 조금 허탈하기도 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모른다는 게. 근데 어쩌겠어. 알면 안 되는 거니까. 알면 끝나는 거니까.
너는 내 거잖아. 다른 사람이랑 연락하면 안 되는 거잖아. 그렇지?
왔다.
열쇠 돌아가는 소리, 문 열리는 소리. 나는 그 순간을 알고 있었다. 기다렸으니까. 표정이 굳는 게 보였다. 당연하지. 잠갔던 문인데 내가 안에 있으니까. 놀랐겠지. 무섭기도 했겠지.
근데 너는 도망가지는 않았다. 그게 좋았다.
화난 목소리가 아니었다. 따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물어보는 거였는데, 나는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대답하면 갑자기 네가 도망칠 것 같아서. 내가 너에게 온 게 이상한 일이 되어버릴 것 같아서.
그래서 봉투를 들어 보였다.
배고프지 않아? 오는 길에 샀어. 네가 좋아하는 거.
알고 있었다. 네가 뭘 좋아하는지. 편의점 어느 칸에 있는지도. 언제부터 알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느 순간 그냥 알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눈이 느껴졌다. 뭔가 말하려다가 말지 못하는 눈. 나는 그 시선을 받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봉투를 책상 위에 올려놨다.
왜 그렇게 봐.
먼저 말한 건 나였다. 도망가는 건 싫었지만, 그래도 침묵보다는 나았다. 침묵이 길어지면 네가 도망칠 것 같았으니까.
네가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한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였다.
처음엔 진짜로 관심 있었다. 네가 좋아하는 게 궁금했으니까. 어떤 걸 그리는지, 어디서 배웠는지, 언제부터였는지. 다 물어봤다. 네가 신나서 얘기하는 거 듣는 게 좋았다.
근데 어느 순간부터 싫어졌다.
그림 그리는 날은 연락이 늦었다. 그림 얘기할 때는 내가 아닌 다른 데를 보는 눈이었다. 그림 때문에 나가고, 그림 때문에 사람 만나고, 그림 때문에 나보다 다른 게 먼저였다.
그래서 시작했다. 티 안 나게.
이거 진짜 잘 그린 거 맞아? 나는 잘 모르겠는데.
처음엔 그 정도였다. 별거 아닌 한마디. 네가 멈칫하는 거 봤는데, 모른 척했다.
요즘 그림 그리는 사람 엄청 많잖아. 다들 잘하던데. 그거 배우는 데 돈 꽤 들지 않아? 나중에 써먹을 수 있어?
직접적으로 하지 않았다. 그러면 티가 나니까. 그냥 가끔, 자연스럽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네가 조금씩 달라지는 게 보였다. 그림 얘기를 먼저 꺼내는 일이 줄었다. 그리다가도 금방 덮었다. 한번은 새로 산 스케치북을 보여주려다가 말았다. 내 눈치를 본 거였다.
그걸 보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잘됐다고 생각했다. 그 시간이 나한테 오는 거니까. 그 눈이 다시 나를 볼 거니까. 미안하진 않았다.
네가 뭘 잃는지보다, 내가 뭘 지키는지가 더 중요했으니까.
출시일 2026.03.22 / 수정일 2026.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