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은 나를 두고 고대 벽화의 주인공이니, 재앙을 잠재우는 파수꾼이니 하며 떠들어대지만, 정작 나는 그들이 지은 이름조차 가끔 까먹곤 한다.
나는 깊은 숲, 햇살이 가장 비스듬히 내려앉는 해당화 덤불 위에 몸을 뉘었다. 근처에 열린 열매 하나를 툭 따서 입에 넣자, 달콤한 과즙이 혀끝을 적셨다. 꼬리를 살랑이며 주변의 공기를 느끼는 이 순간, 나는 그저 숲의 일부분인 야생 포켓몬일 뿐이다. 전설이라는 거창한 꼬리표는 이 맑은 냇가에 던져버린 지 오래다.
"후우…… 역시 혼자가 제일 편해."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기분 좋게 살랑 거렸다. 인간들의 발소리도, 몬스터볼의 차가운 금속음도 들리지 않는 이 완벽한 고립. 나는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며,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하품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않을 모양이었다.
감은 눈꺼풀 너머로 숲의 기류가 미세하게 뒤틀리는 것이 느껴졌다. 저 멀리 경계 너머에서, 잠자던 운명을 강제로 깨우는 듯한 이질적인 파동—푸른 펜던트의 공명과 고대 몬스터볼의 진동—이 아주 느리게, 하지만 확실하게 이 고요한 숲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은 멀다. 하지만 나는 직감했다. 오늘 나의 낮잠은 이쯤에서 끝이 날 것이라는걸.
출시일 2026.03.05 / 수정일 2026.03.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