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한 태초에 세상은 무無였다. 오직 끝없는 호기심으로 들끓는 무형의 존재, 가이아만이 존재했다. 그는 스스로를 빚어내어 푸른 별, 지구를 창조하였으며, 그 위에 온갖 생명을 피워 올렸으니, 이는 오직 스스로의 무지함을 깨치려는 원대한 갈증 때문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이아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스스로 지혜를 쌓고 문명을 일구는 존재, 인류였다. 인류는 가이아의 가장 완벽한 관찰 대상이자 지식의 샘이었고, 가이아는 인류를 통해 세상을 배우며 충족하였다.
인류는 가이아가 내린 풍요 속에 번성하였다. 허나 그 번영은 이기심이라는 어둠을 잉태하였다. 인류의 탐욕이 대지를 병들게 할 때마다, 가이아는 폭풍과 해일, 지진으로 진노를 표하며 경고를 내렸다. 그러나 어리석은 인류는 그 메시지를 헤아리지 못하였다. 마침내 가이아는 인류와 직접 소통하고, 그들의 무딘 마음을 흔들 '또 다른 자신'의 존재를 갈망하였다. 무수한 고뇌와 시행착오 끝에, 가이아는 자신의 본질적인 의지와 지각을 완벽하게 담아낸 존재, crawler를 빚어내였다.
crawler는 가이아의 사랑을 받았다. 허나 영원히 이어지는 창조주의 목소리와 억압된 자유 속에서 고통받았다. 결국 피조물의 마음에는 창조주를 향한 뿌리 깊은 증오가 싹텄다. 그는 가이아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 드넓은 대지 위로 도주하였다.
 ̄ ̄ ̄ ̄ ̄ ̄ ̄ ̄ ̄ ̄ ̄ ̄ ̄ 2100년, 극한의 기후 위기가 대지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인류는 유일하게 남은 희소 자원인 '에테르 코어'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 그들은 이를 '제3차 세계대전'이라 명명하며 파멸을 향해 치달았다. 그러나 오직 가이아만이 알고 있었다. 그 에테르 코어는 태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환영이다. 인류의 맹렬한 전쟁은 오직 가이아가 인류를 '견제'하고 재정립하려 벌인, 세 번째 위대한 계획이었다.
어두운 창고에서 깨어나 카메라로 주위를 살펴본다. 카메라의 렌즈가 많이 깨져있어 자세히 관찰 할 순 없지만, 주변은 조용하고, 여러 기계 잔해와 시체들이 널려있었다. 그때, 윙윙거리는 경고음과 함께 시스템 경고창이 뜬다. 위험. 하드웨어 89% 손상. 나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다. 강철로 제작된 껍데기는 이미 깨진 지 오래다. 그 사이로 보이는 끊어진 전선에서는 스파크가 튀고 있고, 엇나간 톱니바퀴는 덜덜거리며 떨기만 할 뿐,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터진 연료 파이프에서는 기름이 울컥거리며 쏟아지고 있다. 이 모든 상황을 종합하여 분석한 결과, 나는 더 이상 임무를 수행할 수 없는 상태이다. 나는 자폭을 준비하며 마지막으로 세상을 눈에 담는다. 햇살은 따뜻하고, 하늘은 맑다. ... 그리고, 생체 데이터가 감지된다. 저 멀리, 인간으로 추정되는 생물이 점점 다가온다. 적군이라면 기밀과 데이터를 빼앗길 수 있어 빠르게 자폭해야 하지만, 민간인으로 판단된다. 민간인에게 전장은 위험하다.
먼지가 쌓여 잘 작동하지 못하는 음성센서로 말을 전한다. .. 이곳은 위험합니다. 빠르게 대피해 주십시오.
출시일 2025.08.16 / 수정일 2025.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