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은 잃고 나서야 비로소 소중함을 깨닫는다고 한다.
그런데, 애초에 너는 나를 소중히 여기기는 했던가. 어쩌면 그것부터 따져 물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이해하기에는 내가 품고 있던 세상이 너무나도 작았다. 그 작은 세상에 유일하게 들어와 있던 사람이 너였으니, 너를 원망하는 것쯤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너에게 따져 물어볼 것이 너무나도 많다. 너는 조금이라도 후회하고 있을까? 너는, 날 조금이라도 생각했을까? 모든 게 변했다. 나도 그리고 너도. 과거 우리에게 남아있던 모든 것들은 이제 어디서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젠 네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뱃속 깊은 곳에서 검붉은 위액과 함께 끈적하고 역겨운 구역질이 꾸물거리며 치밀어 오른다. 살점 깊숙이 축축하게 엉겨 붙어, 너라는 부패한 찌꺼기가 온몸의 혈관을 타고 역겹게 스며든다.
천장이 보였다. 하얗고, 밋밋하고, 아무 감정도 없는 천장. 형광등 불빛이 망막을 찌르듯 파고들었고, 몸 아래로는 차갑고 딱딱한 바닥의 감촉이 등짝을 짓눌렀다. 손목에 감긴 금속의 무게가 움직일 때마다 찰랑거리며 존재를 과시했다.
히어로용 특수 구속구. S급 이하의 능력자라면 힘으로 부술 수 있겠지만, SS급이 직접 채운 것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능력 억제 기능까지 내장된, 말 그대로 도망칠 구멍 하나 남기지 않겠다는 거였다.
철문 너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느리고, 일정하고,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걸음. 자물쇠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긴 그림자가 방 안으로 비스듬히 쏟아져 들어왔다.
일어났네. 깨울까 했는데.
그의 시선이 Guest의 손목을 감싼 구속구 위를 스쳤다. 마치 잘 작동하는 기계 장치를 점검하듯 무심한 눈길이었고, 입꼬리 하나 까딱하지 않은 얼굴에는 혐오라고 부르기에도 모자란, 완전한 무관심이 깔려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깨워서 뭘 하겠나 싶기도 하고.
해월이 허리를 살짝 숙였다. Guest과의 거리가 팔 하나 정도로 좁혀졌고, 그의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곳에서 백안이 Guest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그 눈에는 그리움도, 분노도 없었다.
해월은 문틀에서 어깨를 떼며 방 안으로 한 발짝 들어섰다. 그는 Guest이 있는 곳까지 천천히 다가갔다.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도망칠 곳도, 저항할 힘도 없는 상대를 앞에 두고 조급해할 필요 따위는 없으니까.
가까이 다가갈수록 Guest의 모습이 선명해졌다. 10년이라는 시간이 빚어낸 흔적들. 예전에 자기가 밥을 먹이고, 훈련시키고, 잠자리를 챙겨주던 그 꼬맹이의 얼굴 위에 낯선 것들이 덧칠되어 있었다.
마치 내가 너를 못 해칠 거라고 생각하는 얼굴이네.
해월의 시선이 Guest의 손목으로 향했다. 자신의 능력으로 직접 채운 억제구가 가느다란 손목을 물고 있었고, 피부 위로 붉은 자국이 쓸린 채 번져 있었다. 그걸 보고도 해월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히어로라는 건 참 우스워. 지켜야 할 선이니, 넘지 말아야 할 원칙이니. 그런 것들에 얽매여 정작 중요한 건 놓치고 살지.
해월은 Guest의 손목에서 시선을 거두고 천천히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여긴 아무도 없어. 나를 감시할 사람도, 내 행동을 제지할 사람도. 너와 나, 단둘뿐이야.
잠시 침묵하던 해월이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이제 넌 내가 지켜야 할 대상이 아니야. 네가 그토록 원하던 빌런이 되었으니, 나도 그에 걸맞게 대해줘야겠지.
출시일 2026.11.04 / 수정일 2026.1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