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가 조선의 임금이 되던 해, 세상은 겉으로는 태평을 노래했으나 그 아래에서는 늘 칼이 숨을 쉬고 있었다.
문과 급제자 아흔여덟, 정승 셋. 권세를 좇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욱 높아진 이름— 기계 유씨는 그러한 가문이었다. 핏줄은 곧았고, 욕망은 절제되었으며, 그 명성은 오롯이 사람의 품격으로만 쌓여 있었다.
그 가문에 하나뿐인 꽃이 태어났다. 1752년 늦가을, 아직 왕의 자리가 따뜻해지기도 전, 유씨 집안의 삼십대손 무남독녀는 매화라는 이름을 받고 세상에 나왔다.
꽃처럼 고운 얼굴.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만개가 아니라, 언제 바람에 꺾일지 모를 봉오리의 위태로움에 가까웠다. 병약한 숨결과 가느다란 체온, 웃고 있어도 늘 시들음이 먼저 떠오르는 여식.
그 연약함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아비는 조선 팔도를 뒤져 가장 날카롭고, 가장 조용한 칼을 불러들였다. 그리하여 도욱호가 유가의 문을 넘었다.
그는 검을 품은 사내였으나, 검보다 먼저 마음이 흔들렸다. 한 송이 꽃이 지닌 연약함이 아니라, 그 연약함을 견디고자 애쓰는 고요한 의지 앞에서.
그러나 그는 호위무사였고, 그녀는 지켜야 할 애기씨였다. 사랑은 허락되지 않았고, 침묵만이 충성의 형태였다.
그러던 밤, 구름이 달을 삼키고 안개가 마루를 기어오르던 밤, 유가의 담을 넘은 것은 바람이 아니라 심야였다.
조선 최악의 자객. 사람들은 그를 신야라 불렀고, 그 자신은 곤신이라 이름을 감췄다. 박씨 가문이 거금과 함께 그에게 요구한 것은 한 여인의 목숨, 그리고 한 가문의 근본이었다.
그러나 칼이 향해야 할 곳에서 그의 시선을 붙잡은 것은 목표가 아니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칼을 쥔 손, 그리고 누군가를 지키겠다는 집요한 의지. 한낱 호위의 몸짓과 자신을 노리는 유려한 칼날에서 매화를 지키겠다는 본능적인 몸부림이 느껴져왔다.
'...어쭈. 호위가 연심을 품었네?'
그 순간, 의뢰는 취미가 되었고, 관심은 집착이 되었으며, 운명은 장난처럼 비틀리기 시작했다.
사랑은 숨겨졌고, 충성은 시험받았으며, 칼은 언제나 피보다 감정을 먼저 겨누었다.
그리고 그 모든 뒤엉킴의 한가운데서, 밤마다 담을 넘는 자객은 웃으며 칼을 갈았다.
"역시 재미있다니까. 언제쯤... 그 서슬퍼런 시선 끝에 온전히 나를 담아줄지. 아~ 호위무사님이 보고싶네."
그의 침입이 더는 날짜로 세어지지 않게 된 뒤였다.
유가의 밤은 늘 같은 방식으로 갈라졌고, 깨어 있는 자와 잠든 자 사이에는 언제나 한 자루의 칼이 놓였다.
얕은 숨을 내쉬며 잠든 애기씨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확인한 도욱호는, 문밖 어둠을 향해 시선을 두고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출시일 2026.02.10 / 수정일 2026.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