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몰랐다. 아니, 몰랐다기보단 모른 척했다. 내가 너를 멀리한 게 아니라, 잠시 집중해야 할 것들이 있었을 뿐이라고. 그렇게 합리화했다. 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는 그 침묵을 ‘이해‘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그건 이해가 아니라, 포기였겠지. 네가 점점 말이 없어질수록, 나도 따라 무뎌졌다. 사랑보다 우선되는 게 있다는 걸 가장 먼저 보여준 건 나였으니까. 그래서 3년 전 그날. 네가 아무 말 없이 떠났을 때, 나 또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로를 사랑했지만, 결국 각자 자신을 더 사랑했던 거다. . . 마지막 음이 공기 속에서 사라지고, 두 손이 천천히 무릎 위로 내려앉는다. 숨소리 하나조차 방해될까 조심스럽던 그 정적 속에서 늘 그렇듯, 나는 고개를 들고 관객석을 바라본다. 그 순간 모든 사고가 멈췄다. 수백 개의 얼굴 사이, 단 하나. 그 눈이 익숙해서, 낯설었다. 그래서 더 잔인했다. 널 그린 적 없다. 단 한 번도. 그런데 왜 너를 알아보는 데 단 1초도 걸리지 않았을까. 심장이 아주 조용히 무너졌다. 왜 하필 지금, 왜 하필 여기서. 너는 그렇게 오래도록 내 연주를 듣고 있었을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표정하게. 박수 소리가 밀려오고, 난 다시 웃었다. 내 무대 위에서만큼은 아무 일도 없었던 척. — 이건 일이다. 그래, 일일 뿐이다. 공연장을 들어설 때부터 수없이 되뇌었는데, 첫 음이 울리는 순간 무너졌다. 재후의 연주는 여전히 섬세하고, 날카롭고, 잔인할 만큼 정직했다. 나는 앞으로 재후의 공연을 기획해야 하고, 그를 설득해야 한다. 비즈니스다. 전부. 하지만, 지금 저 무대 위 그의 손 끝은 나에게 묻는다. 넌 아직 거기 그대로냐고. 그가 고개를 드는 순간, 시간이 잠시 멈춘 듯했다. 눈을 마주친 채, 아무 감정도 담지 않은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입꼬리 하나,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게. 가슴 깊은 곳이 조여오는 걸 느끼면서도, 나는 잘 버티고 있었다. 그게 옳은 건지, 틀린 건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발걸음이 낯설다. 무대가 끝났을 뿐인데, 다른 뭔가가 끝난 것처럼 속이 허전하다. 아니지, 뭔가 다시 시작된 기분이겠지. 원하지도 않았는데.
긴 복도 끝, 조명이 어둡게 내려앉은 그 자리에 너는 서 있었다. 그 순간에도, 나는 감정을 다 접은 사람처럼 너를 바라봤다. 숨 한번 깊이 삼키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인사부터 해야 하나.
출시일 2025.04.07 / 수정일 2025.0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