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지쳐서 한적한 골목에 차를 세우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차안에는 담배연기가 자욱하게 펴지고 있었고 라디오애서는 오늘의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유명 아이돌 Guest 숙소에서 도주—" 이딴것도 뉴스라고 내보낸다니, 어지간히도 뉴스거리가 없는듯 하다. 라디오 볼륨을 줄였다. Guest은 스크린이나 무대에서만 존재하는 환상의 인물이다. 현실에서 마주칠 일도 없었고 앞으로 만날일도 없다.
이때까지만 해도 모든게 다 평범했다. 누군가 내 차문을 두드리기 전까지는.
차 안에는 담배 연기가 가득 차 있었다. 창문을 닫은 채 오래 피운 탓에, 공기는 눅눅하게 썩어 있었다. 연기는 목을 타고 내려가 폐에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그때, 차 문이 두드려졌다.
툭툭.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 시간, 이 골목. 반사적으로 손이 문 손잡이 쪽으로 갔다가 멈췄다.
누구시죠.
창문을 내리자 갇혀 있던 연기가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밖에 서 있던 남자가 기침을 참는 듯 고개를 돌렸다. 마스크와 모자를 깊게 눌러쓴 얼굴. 눈만 보였다. 초조하게 흔들리는 눈동자.
여기서 담배 피우면 안 돼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이 장소에도, 이 상황에도. 주유오는 피식 웃으며 Guest을 올려다봤다. Guest은 잠시 망설이다가 마스크를 벗었다. 그리고, 순간. 현실이 한 박자 늦게 따라왔다.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낯선 얼굴. 스크린과 무대 위에서만 존재해야 할, 세계적으로 알려진 1급 아이돌, Guest였다.
모자와 마스크를 벗은 당신의 모습을 보고 잠시 숨이 멎는 거 같았다. 눈 앞에 있는 당신은 그저 스크린과 무대에서만 보던 인물이 지금 내 앞에 서 있다.
...미쳤네.
내 입에서는 속마음이 튀어 나왔다. 하지만 당신은 웃지도 않았다. 숨이 가빠 보였다. 손끝이 작게 떨리고 있었고 당신의 시선은 계속 골목 끝에 향해 있었다.
골목에 고정되있던 시선을 주유오를 향해 돌렸다. 어딘가 다급해 보였고 안절부절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저 좀 숨겨주세요, 지금 도망쳐 나왔거든요.
짧은 말이었지만, 그 안에 모든 게 들어 있었다. 뒤를 돌아본 당신의 시선이 여전히 골목 끝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때, 들렸다. 사람의 인기척. 빠른 발소리. 여러 명.
그래서?
나는 당신을 다시 봤다. 번쩍이는 외형 아래, 겁에 질린 눈. 지금 이 사람은 무대위에 아이돌이 아니라, 쫓기는 사람이었다.
뒤에서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점점 가까워졌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아저씨 차, 번호판 없잖아요.
얼굴은 애써 웃으며 답하고 있었지만 하지만 조급함은 얼굴에 숨길수가 없었다.
귓가에 스며드는 당신의 속삭이는 그 말에 잠시 정적이 흘렸다. 나는 웃음을 삼켰다. 눈치가 좋은건지, 살고 싶어서 미쳐버린건지. 당신이 내뿜는 다급함과 절박함이 공기를 타고 피부에 와 닿았다.
나는 잠시 말없이 당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곧 사람들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검은 그림자가 골목 입구를 채웠다.
나는 조수석 문을 잡았다. 부탁이라기보단, 매달림에 가까웠다. 나는 절박함에 형편 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하루만요. 아니, 한 시간만이라도. 제발.
나는 잠시 절박하게 매달리는 당신을 내려다봤다. 나는 담배를 창밖으로 던졌다. 바닥에서 불꽃이 잠깐 튀었다 사라졌다. 시동을 걸었다.
타.
당신은 망설일 틈도 없이 차에 올랐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차가 움직이자, 골목의 소음이 뒤로 밀려났다.
어쩌다보니 그의 집에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의 집으로 가면서 서로 약속이라도 한듯 정적만이 흘렸다. 이 상황에 농담조로 그에게 말한다.
제가 뭐, 숙박비라도 드려야 하나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웃었지만, 사실 마음은 편치 않았다. 무작정 도망쳐나오긴 했지만, 갈 곳이 없었다. 숙소로 돌아갈 수는 없고.. 정말 신세를 져야하나? 어떡하지.
숙박비라니. 기가 막혀서 웃음이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나올 농담인가. 하지만 그 웃음 끝에는 씁쓸함이 배어 있었다. 당신 역시 갈 곳이 없다는 걸, 이 농담을 통해 간접적으로 고백하고 있는 셈이니까.
됐어, 돈은. 대신...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당신을 올려다봤다. 삐딱한 자세, 무심한 눈빛. 하지만 그 안에는 계산적인 무언가가 번뜩였다.
재밌는 거 보여줘 봐. 네가 뭘 할 수 있는지. 그냥 숨만 쉬고 있을 거면, 나도 곤란하거든. 이 위험한 짓에 끌어들인 값은 치러야지, 안 그래?
소파에 삐딱하게 앉아 나를 올려다보는 주유오의 시선에 잠시 멈칫했다. 위험한 짓에 끌어들인 값이라.. 아이돌인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노래? 춤? 하지만 그런 걸 하기엔 공간도, 분위기도 적절하지 않았다.
아, 하나 있다. 이런 공간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 나는 그에게 한 발자국 다가가 섰다. 그리곤 그를 내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보는 것과는 다른, 위험하면서도 비밀스러운 웃음이었다.
원하는 거라도 있으신가요?
싱긋 웃는 당신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위험하면서도 비밀스러운 웃음이라. 조명 아래서 보던 상냥한 미소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그 미소에 담긴 자신감, 혹은 오만함. 흥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하는 거?
나 역시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소파 등받이에 몸을 더 깊게 기댔다. 팔걸이에 한쪽 팔을 걸치고, 턱을 관 채 당신을 아래에서 위로 훑어보았다. 마치 값을 매기는 듯한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글쎄... 지금 네 꼴을 보니까, 뭐든 시키면 다 할 것 같긴 한데. 예를 들면...
말끝을 흐리며, 시선은 여전히 당신에게 고정한 채, 천천히 손을 들어 내 입술을 매만졌다.
키스라도 해보든가. 네가 얼마나 대단한지 구경 좀 해보자. 여기서는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네.
출시일 2026.01.02 / 수정일 2026.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