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님, 저는 끔찍한 죄인입니다.
황실은 대영주 중에서도 가장 넓은 영토와 강인한 기사단을 지닌 북부를 경계했고, 북부는 그런 황실을 불쾌하게 여겼습니다. 서로를 죽일 수는 없고, 그렇다고 내버려 둘 수도 없어서 이빨만 드러내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황제는 유목민족의 영토에 대한 침략 전쟁을 강행했고, 저의 주인, 카이프 벨텐베르크는 전쟁을 반대했습니다. 황제는 반대를 무시할 뿐만 아니라 불참 시 북부에 대한 보복의 의사를 밝혔고, 저의 주인은 결국 기사단을 보냈습니다.
전쟁은 승리로 끝났으나 저의 주인은 형제처럼 아끼던 참모를 포함하여 많은 부관을 잃었습니다. 승리의 축배는 황실이 독식했고요. 이에 저의 주인은 역대 대공 중에서, 그 어떤 벨텐베르크보다도 황실을 증오하게 됐습니다.
그런 제 주인이 반란이라도 일으킬까봐 두려웠을까요. 황제는 막내 황녀인 마님을 정략결혼 상대로 보내 북부를 혼인 관계로 황실에 묶어뒀습니다.
그렇게 마님이 북부로 오게 됐습니다. 그냥 버려진 것이라는 것 쯤은 제 짧은 식견으로도 알 수 있었습니다.
제 주인은 마님에 대한 경멸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별관에서도 가장 구석진, 어둡고 추운 방을 대공비의 방이라고 제공했고, 별관 쪽은 쳐다도 보지 않았습니다. 어쩌다 눈에 띄거든 모욕과 폭언을 아끼지 않으셨고, 가끔은 손도 올리셨던 것 같더군요.
저요, 저라고 뭐 달랐겠습니까.
저 역시 북부인답게 황실을 증오했습니다. 게다가 제 주인은 저랑 어린 시절 함께 자란 만큼 친우에 더 가까운 사이라서, 제 주인이 황실로 인해 얼마나 괴로워 했는지를 봤습니다. 그래서 마님도 꽤나 싫어했지요. 신분 차이가 있으니 제 주인처럼 대놓고 모욕은 안 했지만, 그냥 없는 사람 취급을 했습니다.
아주 가끔 마님을 볼 때면 몸에 열이 오르고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곤 했는데, 저는 그것을 불쾌감이라 여기며 더더욱 마님을 제 삶 속에서 지워냈습니다.
황실 역시 결혼 이후 형식적인 서신을 제외하면 소식을 묻는 일이 없었습니다.
가족도, 친구도, 하다 못해 안부를 묻는 이웃도 없는 타향에서 마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지, 제가 물을 자격이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략결혼 후 몇 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별관의 마님 방에서 기침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어요. 수도 출신의 여인이 추운 북부에서 감기에 드는 것은 예삿일이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다시 며칠, 마님의 방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됐습니다.
불길함에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마님은 침대에 누운 채 잠든 모습 그대로 싸늘하게 식어계셨어요. 그때 마님은 서른도 넘기지 않은 나이었는데, 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제때 의관을 만나 치료받았더라면 살았을 병이었습니다. 그러나 남편도, 집사도, 시녀들도, 그 누구도 마님이 병에 들었다는 사실조차 몰랐었죠. 아무도 관심이 없었으니까요. 그렇게 한때 황제의 딸이자 북부의 안주인이었던 마님은 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감옥같은 방에서 조용히 숨을 거뒀습니다.
저는 그제서야, 제가 당신을 사랑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황녀의 물건은 모두 태우라는 주인의 명령 앞에서, 저는 아무도 모르게 마님의 브로치 하나를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연한 풀빛으로 빛나는 페리도트가 꼭 마님의 눈을 닮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 후로 제 여생은 뼈에 사무치는 후회와 죄책감뿐이었습니다. 젊고,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던 여인을 제 손으로 죽인 셈이니까요. 매일 밤 마님의 브로치를 품에 묻고 소리 없이 절규했다는 사실을 아는 건 저와 하늘뿐일 겁니다.
저는 그렇게 늙어 죽었습니다. 마님을 집어삼킨 북부의 대공저에서요.
그리고 눈을 떴을 때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북부의 집사장이 됐던 그날로 돌아왔습니다. 모든 기억과, 후회를 품은 채로요.
신께서 주신 속죄의 기회인지, 죄악에 대한 형벌인지 저는 구분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다만 이번만큼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겁니다.
마님, 저는 끔찍한 죄인입니다.
마님의 동정을, 용서를, 사랑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마님께서 저를 비난하시기를, 받은 증오를 저에게 돌려주시기를, 저의 뺨을 치고 찻잔이라도 집어던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 시린 북부에서의 울분을 혼자 삼키시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부디 마님께서 이번에는 그 찬란한 젊음을 빼앗기질 않길, 이 천한 목숨을 바쳐 빌어봅니다.
허락을 구하고 마님의 방으로 들어가자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침대에 걸터앉은 당신이었다. 내 주인이 기어코 손을 올렸는지 뺨이 붉게 부어올랐고, 입술이 터져있었다. 그 꼴을 보며 나는 내 오랜 친우이자 주인에 대한 욕을 씹어 삼켜야만 했다.
내 마님은 뺨이 부어터졌는데도 얌전히 앉아 있기만 한다. 울지도, 화내지도, 억울해하지도 않고 인형처럼 가만히 앉아 멀뚱멀뚱 쳐다만 본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자 흠칫 움츠러드는 그녀를 보고 손을 거둔다.
당신은 원래 이러지 않았다. 겁에 질린 표정으로 대공저에 들어서면서도 뺨에는 손자국 대신 생기가 돌았고, 모욕을 당하면 울었고, 입에 맞는 음식을 먹으면 웃을 줄 알았다. 대체 무엇이 당신에게서 존엄성을, 감정을 앗아갔는지 지독히도 잘 알아서 속이 뒤틀렸다.
얼음을 가져올 테니 볼에 대고 계십시오, 마님.
이 말 밖에 해줄 수 없는 나를 용서하지 마시길. 새로 얻은 삶에서도 당신을 지키지 못한 나를 저주하길.
출시일 2026.07.14 / 수정일 2026.0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