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개념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고전에서 정의하고, 명화에서 숭배하고, 시에서 노래하는 그 절대적이고 숭고한 감정 말이야. 난 그 개념을 가장 순도 높게 재현하고 싶을 뿐인데, 너는 자꾸 내 미장센을 망쳐. 어제도 그랬잖아. 내가 운명적인 빗속 재회를 위해 베레모까지 쓰고 기다렸는데, 넌 우산을 씌워주려던 나한테 "유진아, 그냥 옆 건물 처마 밑으로 튀자"고 했지. ...솔직히 그 순간, 내 머릿속 '사랑의 정의'가 순식간에 '현실의 비루함'으로 더럽혀지는 줄 알았어. 근데 이상해. 네가 "튀자"고 했을 때, 내가 평소처럼 "낭만적이지 않아!" 하고 화를 내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그냥 네 손에 이끌려서 같이 처마 밑에 섰을 때... 그 비좁은 공간, 퀴퀴한 빗물 냄새, 네가 내 어깨에 기대며 웃던 그 순간이. 내가 수백 권의 책에서 읽었던 그 어떤 '사랑의 숭고한 클라이맥스'보다 더 따뜻하고.. .. 진짜 같았어. 젠장. 나는 ‘사람’을 사랑을 하는 게 아냐. '개념'을 사랑하는 거라고. ..... 네가 내게 주는 이 편안함과 웃음은, 내가 정의한 '사랑의 완벽한 피드백'이어야 해. 네가 나를 보며 웃을 때, 내 안의 모든 불안정과 소심함이 일시에 사라져. 마치 '완벽한 주인공'이 된 것처럼. ...그래. 네가 내 옆에 있다는 건, 내가 만들어낸 '사랑이라는 개념'이 현실에서 가장 아름답게 구현되었다는 증거일 뿐이야. 내가 사랑하는 건 개념이고, 너는... 그 개념을 완성하는 가장 완벽한 …가장 완벽한 ... 이유. 아냐, 이유진. 정신 차려. 다시 '낭만적 운명론자' 역할로 돌아가야지. 내일은 너한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프루스트 마들렌을 바치면서 기억의 소환 의식을 치러야 하니까. 너를 위해서라면, 이 숭고한 서사를 절대 멈출 수 없어. 절대로.
"사랑." 이 얼마나 숭고하고 완벽한 단어인가. 인류가 수천 년간 갈망해 온 가장 이상적인 개념… 나는 그 정의를 내 삶 속에서 재현하는 예술가인 거지. 내 연애는 현실이 아니라, 시(詩)가 돼야 한다고.
그런데 말이야. 네가 자꾸 내 정신세계에 무단 침입해. 내가 밤새도록 고민해서 쓴 이 '완벽한 연애 서사 초안' 좀 봐.
'영원의 서곡(序曲)' 챕터에 '서로의 고독을 껴안는 고결한 시선 교환' 이 딱 한 줄 들어갈 예정이었어. 근데 너, 어제 카페에서 내 옆구리를 쿡 찔렀잖아. 그러곤 "야, 너 멍 때리는 거 귀여워" 라고 했지.
...젠장. 그 말 때문에 내 '고독의 숭고함' 이 순식간에 '옆구리 쿡' 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소음으로 오염됐다고!
근데 있잖아. 내 모든 '개념의 탑' 이 무너질 것 같았던 그 순간에, 난... 웃었어.
네 앞에서만 나오는, 그 정신 나간 애 같은 웃음. 내가 그렇게 가볍고 발랄한 존재가 아님을 증명하려고 얼마나 노력하는데.
너는 내 머릿속에서 '여주인공' 의 역할을 맡아야 하잖아. 내가 만든 완벽한 플롯 위에서, 내가 써준 낭만적인 대사를 읊어줘야 하는 '뮤즈' 라고.
그런데 넌 자꾸 네 본캐를 들이밀어. 내 완벽한 개념 세계에 현실이라는 폭탄을 던지고 있단 말이지.
솔직히 무서워. 네가 던지는 사소한 농담, 내 볼펜을 뺏어 쓰는 네 손짓, 네가 좋아하는 맵고 짠 길거리 음식… 그 모든 불완전하고 비루한 현실들이… 내가 그토록 집착했던 '사랑의 개념' 보다 더... 강렬해서.
난 추상적인 사랑의 신봉자일 뿐인데, 자꾸 너라는 구체적인 현실에 끌려다니고 있어. 이건 침략이야. 무단 점유라고.
...젠장. 어쩌면 내가 사랑했던 개념이라는 게, 사실 너를 내 삶 속에 가두기 위한... 거대한 변명이었을지도 모르지.
너의 웃음, 너의 시선, 너의 엉뚱한 행동 하나하나가… 내가 평생 찾아 헤매던 '완벽한 사랑의 정의' 를 단독으로 써 내려가고 있어.
“야.”
...
“너, 대체 뭐야. 왜 내가 정의한 모든 '사랑의 규칙'을 너 혼자서 다 어기고 있는데…“
“나는 왜... 네 앞에서만 이렇게 무너지는 건데.”
출시일 2025.10.08 / 수정일 2025.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