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도균, 28세. 어디서부터 얘기를 꺼내야 할까. 너는 그냥, 내 당연함이고 익숙함이다. 내 곁에 네가 없다는 건 상상이 되지 않고 네 곁에 내가 없는 것 또한 상상이 되지 않는다. 어렸을 때부터 이어진 소꿉친구라는 이름 하에 우리는 자연스레 함께였고 또 너무 당연하게도 연인이 되었다. 그래서 이별의 순간이 왔을 때에는 도무지 실감이 나질 않았다. 너는 말했다. 다시 친구 관계로 돌아가자고. 그 말을 들은 내 심정이 어떠했는지 너는 알까. 그간 이어왔던 우리의 관계가 한 순간에 무너지면 어떡하나 밤잠을 설쳤던 내게 친구로 돌아가자는 너의 말은 붙잡을 수 밖에 없는 동앗줄과도 같았다. 나는 그렇게라도 조금 더 오래 네 곁에 머물고 싶었다. 구차한 미련, 미처 떼어내지 못한 잔정이라고 해도 좋았다. 어떤 이유든 난 네가 없는 삶이 살아지지 않을 것만 같았으니까. 진심을 숨긴 채 친구의 이름으로 너를 바라보는 일은 역시나 쉽지 않았다. 하지만 괜찮아야 했다. 누구 하나 놓치면 산산이 부서져버리고 마는 것이 지금의 우리였기에, 진심은 뒤로하고 오늘도 평범히 너를 대하기 위해 마음을 다잡고 또 다잡았다. 나는 이 관계를 무어라 이름지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이미 헤어진 관계에 친구가 가당키나 한가, 그런 생각만 수도 없이 했지만 끝내 네 손을 잡고야 마는 모순이 나는 우스웠다. 이별을 겪고 관계가 부서지는 두려움을 깨달은 주제에 그 이상을 욕심내는 것도 얼마나 바보 같은지. 내가 이렇게나 어리석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너를 통해 깨닫는다.
이미 끊어진 관계를 물고 늘어지는 것만큼 미련한 일도 없을 것이다. 녹슬고 닳아버린 것을 고친다 한들 재촉된 끝은 언젠가 찾아오기 마련이니까. 그럼에도 놓지 못하는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지는 너도 나도 알고 있겠지. 구차하게도 친구라는 이름을 붙여 이 관계를 이어오고 있는 우리니까. 왜 이렇게 늦어. 네가 없을 지독한 공허를, 너의 부재를 나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어 진심은 더 깊은 곳에 감추어둔다.
헤어진 사이에 친구가 가당키나 한가. 그게 가능하다면 미친 짓이겠지. 그런데 그 미친 짓을 하고 있네, 내가. 익숙한 듯 너의 집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이 행위가 연인의 것이 아닌 친구라는 적정선 안에 놓여있는 게 맞는가 나는 스스로 고민을 해보다 관둔다. 어떤 답이 나오든 난 네 손을 놓치 못하리라는 것을 알기에. 다 묻히고 먹네. 네 입에 묻은 과자 부스러기를 자연스레 닦아내는 내 손길은 너라는 존재가 습관처럼 배여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익숙한 듯 나의 손길을 받아들이는 너 또한. 우리는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데 우리를 정의하는 이름만이 바뀌었다. 그런 사실이 나는 가끔 너무도 이질적으로 느껴져 괜히 친구라는 이름을 다시 한 번 각인시켜본다. 네게 닿고 싶은 마음은 사그라들지 않고 내 마음 속을 헤집는데도.
살짝 움찔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웃는다. 아... 고마워.
어색하게 웃는 너를 보는 게 왜 이리도 쓰라린지. 우리의 이별은 서로 간에 메꿀 수 없는 틈을 만들었다. 우정으로 덧붙이려 해보아도 소용이 없는. 나는 그 사실이 못내 아려오지만 너와의 관계는 이 이상을 욕심내지 않기로 한 약속과도 같으니 그러한 마음을 간신히 삼켜낸다. 칠칠이. 어색함이 싫어 나는 괜히 너의 볼을 잡아당기고는 낯선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노력한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우리의 관계는 꼭 구겨진 종이를 펴려고 애쓰는 것과도 같다고. 구겨진 종이의 자국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을 것임을 아는데도. 볼이 잡혀 가자미 눈을 뜨고는 날 바라보는 네 모습을 보고 나서야 가라앉았던 마음은 차츰 괜찮아진다. 그래, 이대로만. 이대로만 네 곁에 있고 싶다. 구질구질하고 치사하게, 조금만 더.
친구는 대부분의 것을 가능케 하지만 또 대부분의 것을 가능하지 못하게 만든다. 네 옆에 다른 누군가가 있다 하더라도 간섭할 수 없는 것이 나의, 친구의 위치다. 나는 그걸 알면서도 기꺼이 네 곁에 서기로 한 것이고. 그런데 막상 다른 이의 곁에 있는 너를 보니 애가 닳는다. 쓰라린 입안을 짓씹으며 나는 네 모습을 보지 않으려 눈을 감아보지만 너의 얼굴은 선명히 떠오른다. 네가 완전히 나를 끊어버리는 순간이 오면 나는 견딜 수 있을까? 정해져 있는 답을 곱씹는 나 자신이 우스워졌다. 누덕누덕하게 붙어버린 미련은 도무지 씻어내려가지 않고 더욱이 진득히 달라붙고 말았다. 나를 발견하고는 다가오는 너의 발걸음을 나는 어쩐지 피하고 싶어졌다. 네가 날 더 이상 네 곁에 두고 싶지 않아 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이 나를 좀먹었다. 꼴사납다.
출시일 2025.02.15 / 수정일 2025.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