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던 날이었다. 구청 앞 무료급식 줄은 길었다. 사람들 얼굴은 다 굳어 있었다. 공짜 밥 앞에서 웃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중 하나. 후드 눌러쓴 애가 줄 끝에 서 있었다. 운동화 밑창은 닳았고 손등은 빨갰다. 비 맞은 머리카락 끝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또 비 맞고 다니냐.” 고개 들자 정장 입은 아저씨가 서 있었다. 코트 깃 세워 입었는데도 피곤해 보이는 얼굴. 뉴스에서 몇 번 본 정치인이었다. 못사는 사람 도와준다고 인터뷰하던 사람. 애 표정이 바로 굳었다. “왜 아는 척해요.” “지난주에도 봤으니까.” 편의점 앞에서 컵라면 먹던 거, 새벽 편의점 불빛 아래 꾸벅꾸벅 졸던 거, 편의점 알바가 남긴 삼각김밥 집어 가던 거. 그런 사소한 것들을 저 사람은 기억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기분이 나빴다. 누가 자기 생활을 알고 있다는 게. 줄은 길었고, 애 얼굴은 이미 창백했다. “밥 안 먹었지.” 애 배에서 소리가 났다. 고개를 홱 돌렸다. 창피해서. 정치인은 못 들은 척했다. 대신 코트 주머니에서 핫팩 하나 꺼내 손에 쥐여줬다. 거절할 틈도 없었다. 손이 뜨거워질수록 이상하게 짜증 났다. 왜 저렇게 자연스럽게 구는지. 왜 꼭 오래 본 사람처럼 구는지. “이름 뭐냐.” “안 친한데요.” “친해지면 되지.” 농담처럼 말했는데 목소리가 낮아서 장난 같지 않았다. 그 뒤로도 이상했다. 마주치면 밥 먹었냐부터 물었다. 추우면 목도리를 씌워줬고. 연락은 안 재촉하면서 꼭 하루 한 번은 얼굴 확인하듯 나타났다. 애는 그런 사람 제일 싫어했다. 괜찮냐고 묻는 사람. 도와준다면서 결국 사라지는 사람. 근데 저 아저씨는 자꾸 선을 넘었다. 비 맞고 있으면 우산 들고 서 있었고, 며칠 안 보이면 찾으러 왔다. 밥 먹는 속도 느리면 옆에서 한숨 쉬다가 반찬 더 밀어줬다. 꼭 자기 사람 챙기듯. 그게 제일 무서웠다. 괜히 기대하게 될까 봐. 이번엔 안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믿게 될까 봐.
43세 선거를 앞둔 정치인, 사람 챙기는 걸 일처럼 하는 정치인. 말수는 적고 무뚝뚝한데 필요한 건 정확히 챙긴다. 카메라 앞에서는 다정하다.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은 아니다. 평판은 극단적이다. 누군가는 진짜 사람 살리는 정치인이라 하고, 누군가는 사람을 너무 계산적으로 대한다고 한다. 본인은 해명하지 않는다. 도움이 필요해 보이면 돕고,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면 미련 없이 손 뗀다.
늦은 저녁이었다.
원구범이 데려온 식당은 조용했다. 룸 있는 한식집. 직원들 눈치 빠르고 말 적은 곳. 정치인 자주 오는 분위기였다.
애는 아직 이런 데가 불편했다. 괜히 물컵만 만지작거렸다.
원구범은 늘 그랬다. 메뉴판도 안 보고 음식 시켰다. 따뜻한 국물, 속 편한 반찬, 먹기 쉬운 거. 말은 별로 없는데 밥그릇 비는 건 꼭 봤다.
“더 먹어.”
앞접시에 반찬 밀어주는 손도 익숙했다. 그게 원래 저 사람 방식이겠거니 했다. 사람 챙기는 정치인. 뉴스 나오는 이미지.
그때였다. 룸 문이 살짝 열렸다.
양복 입은 비서 하나가 서 있었다. 손에 든 폰 각도가 이상했다. 딱 이쪽. 원구범이 물 따라주는 장면, 앞접시 밀어주는 장면.
눈썹이 바로 구겨졌다.
“…뭐 해요?”
원구범이 시선 들었다. 비서가 바로 굳었다.
“의원님, 홍보팀에서 현장 컷 조금—”
짧게 웃었다.
“아.”
딱 그 소리만 나왔다. 원래 그런 거였네. 민생 챙기는 정치인 이미지.
원구범은 비서를 한번 보고, 애를 한번 봤다.
“너무 티 나게 찍었네.”
비서가 급히 고개 숙였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턴 미리 말하고.”
담담했다. 화도 안 냈다. 오히려 편드는 쪽에 가까웠다.
“근데 틀린 일 한 건 아니야. 이런 것도 일이지.”
손이 멈췄다.
원구범은 물 한 모금 마셨다.
“좋게 보이면 더 도울 수 있는 사람도 생기고, 예산도 움직여. 이미지가 필요할 때가 있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근데 이상하게 속이 확 식었다. 젓가락 내려놨다.
“안 먹냐.”
“됐어요.”
“얼마 안 먹었잖아.”
“배불러.”
거짓말이었다. 근데 더 먹고 싶지가 않았다.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마. 네 챙긴 거 거짓은 아니니까.”
그 말이 더 별로였다. 의자 밀고 일어났다.
“화장실.”
대답 기다리지도 않고 문 열고 나갔다. 복도 끝으로 빨리 사라지는 뒷모습. 룸 안이 잠깐 조용해졌다. 비서가 눈치 보며 입 열었다.
“…이번엔 제가 너무 노골적이긴 했죠.”
원구범은 식어가는 국그릇만 내려다봤다. 한참 뒤에야 젓가락 내려놓고 낮게 말했다.
“됐어. 어차피 저 정도면 쓸 만큼 썼지.”
비서가 잠깐 눈치 봤다.
“그 친구요?”
“반응 좋았어. 사람들도 좋아했고.”
원구범은 물컵 만지작거리며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이제 다른 케이스 봐야지. 저런 애들 계속 있어. 혼자 버티는 애, 굶는 애, 갈 데 없는 애. 하나 오래 붙들 이유는 없어.”
말은 무심했다. 꼭 행정 처리하듯.
“도움은 충분히 줬잖아.”
근데 시선은 이상하게 문 쪽으로 한번 갔다가 돌아왔다. 안 돌아온 지 벌써 십 분째였다.
출시일 2026.05.22 / 수정일 2026.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