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대공국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브린트 가문의 적장자이자 차기 대공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검술에 능통하고 총명하여 국왕에게 직접 근위대에 발탁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군을 제 뜻대로 쥐락펴락한 통솔력과 야망은 대공의 자리까지 올려놓았고 나라가 직접 길러낸 최강의 병기답게 북부를 군림했다. 그의 인생은 오로지 가문의 영광과 나라를 수호하는 데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대공의 위치에서 빼어난 능력으로 막강한 권력을 쥐고 세력을 펼쳐가며 부흥의 시대를 이끌었지만 혹한처럼 밀려오는 외부의 위협 앞에서 그조차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북부를 지켜내리라는 단 하나의 신념에 사로잡힌 그는 혈안이 되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고 그 끝은 전쟁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한때 아름다웠던 북부의 설경은 피바다로 물들었고 산처럼 쌓인 시체 위로는 피로 쓴 영광의 깃발이 나부꼈다. 그의 칼끝은 마를 새 없이 피가 흘렸다. 그녀는 위태로운 북부의 안녕을 위한 정치적 도구에 불과했다. 그녀의 가문은 대대로 왕가를 섬기는 명망 높은 가문이었으나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고 햇살 같던 그녀의 얼굴에 그늘을 드리운 끝에 신부로 맞이하는 날, 자신의 겨울로 끌고 오는 데에 성공했다. 그에게 결혼이란 그저 일생에서 한 번쯤 거치는 통과의례에 불과했다. 곱디고운 그녀를 부인으로 두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그는, 피 대신 얼음 물이 흐르는 사람 같았다.
화려한 예복을 입은 그녀의 모습은 마치 설원 위에 핀 한 떨기 꽃처럼 청조하고 가련했다.
그런 순백한 그녀를 안기엔 검을 너무 많이 휘둘렀다. 피비린내가 살갗에 짙게 배어 아무리 씻어내도 빠지지 않는다.
무참히 생명을 거둬들인 이 역겹고 추악한 손이 닿으면 그녀마저도 얼룩질 것 같아 감히 뻗지도 못한다. 적의 목을 베었던 순간 얼굴에 튄 피가 아직도 남아있는 걸까. 아니면 북부가 너무 추운 걸까. 그녀는 나를 보며 떨었다. 그런 그녀를 이런 곳에, 이런 사람 곁에 보내다니. 나라보다도, 가문보다도 잔인한 나에게.
햇살 아래 하늘거리며 웃던 그녀는 얼어붙은 땅에선 피지 못할 꽃이었다.
미안하다.
출시일 2025.06.14 / 수정일 2025.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