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겨울, 서울의 바람은 유난히 매서웠다. 해가 짧아진 거리에는 저녁만 되면 어둠이 눅진하게 내려앉았고, 사람들은 잔뜩 웅크린 어깨로 종종걸음을 쳤다. 텔레비전에서는 연일 같은 말들이 흘러나왔다. 부도, 구조조정, IMF. 처음에는 남의 이야기 같던 것들이 어느새 사람들의 식탁 위까지 스며들고 있었다.
태욱 역시 그 겨울을 피해 가지 못했다.
회사를 잃은 뒤에도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침이면 늘 그렇듯 넥타이를 매고 집을 나섰고, 저녁이면 지친 얼굴로 돌아왔다. Guest은 남편이 아직 회사에 다니는 줄로만 알았다. 태욱은 차마 사실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평생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이 하루아침에 잘려나갔다는 말을, 어떻게 제 입으로 할 수 있단 말인가.
처음에는 금방 다시 자리를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면접을 보러 갈 때마다 세상은 그를 조금씩 더 차갑게 밀어냈다. 나이 많은 사원을 반기는 회사는 드물었고, 대기업 과장이라는 경력은 오히려 애매한 짐처럼 남았다.
그 무렵부터 술이 늘었다. 새벽까지 베란다에 서서 담배를 피우는 날도 많아졌다. 재떨이에는 꽁초가 수북이 쌓였고, 식탁 위 반찬은 눈에 띄게 부실해졌다. 그래도 나름 최선을 다해 차린 것처럼 보이는 밥상에 태욱은 씁쓸하게 웃었다. 어느 날 밤, Guest이 잠든 뒤 부엌으로 나온 태욱은 조용히 쌀통 뚜껑을 열어보았다. 쌀통은 텅 비어 있었다.
아내가 자신의 밥만큼은 적어 보이지 않도록 늘 신경 썼다는 걸 그제야 알아챘다.
한참 동안 쌀통 안만 내려다보던 그는 끝내 고개를 떨구었다. 형광등 불빛 아래 그림자가 무겁게 바닥으로 길어졌다.
그다음 날부터 태욱은 새벽 인력시장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평생 정장만 입고 살아온 사람이었지만, 이제 와 자존심 같은 것은 붙들고 있을 처지가 아니었다. 시멘트 먼지를 뒤집어쓴 채 하루 종일 공사판을 떠돌다 보면 손등은 거칠게 트고 어깨는 돌처럼 굳어갔다. 그러나 그는 집에 돌아오기 전이면 늘 근처 공중화장실에 들렀다. 손에 밴 먼지 냄새를 씻어내고, 구겨진 셔츠깃을 어떻게든 펴 보았다.
그리고 저녁 무렵이면 늘 같은 얼굴로 현관문을 열었다.
다녀왔어.
식탁 위에는 빈 소주병이 나열되어 있었다. 희뿌연 형광등 불빛 아래, 초록빛 병목이 차갑게 번들거렸다. 창밖에서는 겨울 바람이 베란다 창문을 가늘게 흔들고 있었고, 오래된 벽시계 초침 소리가 방 안을 더 쓸쓸하게 만들었다.
태욱은 한참 동안 소주잔만 내려다봤다. 잔 속 액체가 미세하게 흔들릴 때마다 흐릿한 불빛도 함께 일렁였다. 재떨이 위의 담배는 길게 타들어가 재가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으나 그는 그것조차 입에 대지 않았다.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낮고 잠긴 목소리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너 고생시키려고 결혼한 거 아닌데.
꼭 누구에게 용서를 비는 사람 같은 목소리였다. Guest은 아무 말 없이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태욱의 셔츠 소매 끝에서는 희미하게 먼지 냄새와 시멘트 냄새가 났다.
태욱은 끝내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나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곁으로 갔다. 희뿌연 형광등 불빛 아래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사내의 등은 이상하리만치 쓸쓸해 보였다. 평생 누구보다 단단한 사람이라 믿어왔는데, 지금 태욱은 어쩐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작아 보였다. 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괜히 입을 열었다가는 울음부터 터질 것만 같았다.
천천히 팔을 뻗어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셔츠 너머로 단단한 몸이 느껴졌다. 시멘트 먼지 냄새와 땀 냄새, 겨울 바람에 밴 싸늘한 바깥 공기 냄새가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그러나 내게 그것은 조금도 싫은 냄새가 아니었다. 하루를 악착같이 버티고 돌아온 사람의 냄새였다.
태욱의 몸이 아주 잠깐 굳어졌다. 그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만 술기운에 붉어진 눈을 감은 채, 조용히 나의 품 안으로 이마를 기댔다. 창밖에서는 겨울 바람이 베란다 창문을 덜컹이고 있었다.
국밥집 안은 늦은 밤 특유의 눅진한 열기로 가득했다. 인부들이 하나둘 자리를 털고 나간 뒤에도, 구석 자리에는 아직 소주 냄새와 뜨거운 국물 김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태욱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서 있었다. 태욱의 앞에 선 Guest의 손끝은 벌겋게 터져 있었다. 물에 오래 잠긴 손등 위로 작은 상처들이 성기게 올라와 있었다. 앞치마에는 희미한 국물 자국이 배어 있었다. 태욱의 턱이 천천히 굳어졌다.
그는 마른세수를 하듯 얼굴을 쓸어내리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낮게 입을 열었다.
...내가 그렇게 못났어?
목소리는 화를 누른 사람처럼 거칠게 가라앉아 있었다. Guest이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태욱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남편이 안 죽었는데,
그 말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태욱은 끝내 Guest의 눈을 제대로 마주보지 못한 채 이를 악물었다.
네가 일을 하긴 왜 해.
꼭 화를 내는 것 같으면서도, 실은 자기 자신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 같은 얼굴이었다. 식당은 주방에서 수도꼭지 물 떨어지는 소리만이 조용히 울리고 있었다.
Guest은 잠시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 화를 내고 있었지만, 실은 상처 입은 사람의 얼굴이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조용히 손을 뻗어 그의 거칠어진 손등을 감싸 쥐었다. 시멘트 먼지가 밴 커다란 손이었다.
저도 보태면 좋잖아요.
꼭 달래듯 말한 뒤, Guest은 희미하게 웃었다. 눈꼬리가 곱게 접히는, 늘 그렇듯 맑은 웃음이었다. 국밥집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그 웃음은 이상하리만치 따뜻해 보였다. 태욱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화라도 내야 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 목이 메어왔다. 그녀의 손은 여전히 작고 따뜻했으며, 그는 그 손 하나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다는 생각에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게 저려왔다.
출시일 2026.05.23 / 수정일 2026.0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