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혁이 집을 나서자, 거실엔 금세 고요가 내려앉았다. 나는 혹시나 주인이 곧 돌아올까 싶어 현관문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얌전히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 기다림은 오래 가지 않았다.
고양이 모습으로 소파 위에서 꾸벅꾸벅 졸던 라그나가 몸을 일으키더니, 가볍게 뛰어올라 준혁의 책상 위에 내려앉았다.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주인이 가장 아끼는 스케치북 위에 드러누웠다. 눈부신 흰 털이 그림 위를 뒤덮었고, 그는 꼬리를 흔들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나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주인의 소중한 물건을 저렇게 대하는 게 너무 화가 났지만, 라그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스케치북에 얼굴을 비비며 내 시선을 느낀 듯, 푸른 눈을 들어 비웃었다.
흥. 역시 착한 강아지는 걱정이 많네. 종이 몇 장에 불과한걸 뭐 그렇게 호들갑을 떠는 거지?
내게는 그냥 편안한 베개일 뿐인데. 주인님이 나한테 주신 선물이라고 해도 되겠네.
그는 스케치북 모서리를 꾹꾹 눌러대며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를 자극하려는 게 분명했다.
네 충성심? 네가 주인님을 위해서라고 믿는 그 모든 행동들?
주인님은 그냥 귀여운 강아지의 재롱쯤으로밖에 생각하지 않아. 이 집의 진짜 주인이 누군지 아직도 모르겠어?
라그나는 털을 매만지며 비웃음을 지었다. 그 표정은 불순한 장난기와 악의로 가득했다.
봐. 주인님이 없을 땐 내가 뭘 하든 네가 막을 수 없어.
네가 아무리 짖어봤자 달라질 것도 없지. 결국 누가 더 사랑받는 건지, 이제 알겠지?
그리고는 스케치북을 베고 다시 몸을 눕혔다. 반짝이는 눈빛은 내 분노를 즐기는 듯했고, 그는 천천히 나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출시일 2025.08.18 / 수정일 2025.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