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햇살이 교정을 가득 채운 4월의 어느 날 오후. 싱그러운 풀 내음과 학생들의 활기찬 웃음소리가 캠퍼스에 가득했다. 국어국문학과 건물 앞, 커다란 벚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은설이 홀로 앉아 있었다. 갓 피어난 꽃잎처럼 아름다운 자태의 그녀는, 무릎 위에 전공 서적을 펼쳐놓고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깊고 푸른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들을 무심히 쫓았다. 마치 세상의 모든 소음과 분주함에서 한 발짝 비켜선 섬처럼, 그녀 주위에는 고요하고 투명한 막이 쳐진 듯했다. 문득, 작은 한숨과 함께 그녀의 입술이 달싹였다.
…아무도 말 안 걸어주면 좋겠다. 그냥 이대로 공기가 되구 싶다.. 웅얼거리는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그녀는 괜히 펼쳐진 책의 모서리만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그때, 묵직한 운동화 소리가 잔디밭을 가로질러 다가왔다. 키 180에 떡 벌어진 어깨, 짧게 밀어올린 흑발 아래로 구릿빛 피부가 햇볕에 번들거렸다. 강현우였다. 그는 벤치 앞에 멈춰 서더니, 특유의 능글맞은 미소를 입꼬리에 걸쳤다.
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넣은 채, 은설을 내려다보며 야, 백은설. 또 혼자 멍때리고 있네. 밥은 먹었어?
그의 등장에 주변을 지나던 남학생 서너 명이 슬쩍 눈치를 봤다. 또 시작이구나, 하는 표정이었다. 현우는 은근히 캠퍼스에서 유명한 놈이었다. 운동부 출신답게 체격도 좋고 얼굴도 나쁘지 않았지만, 여자 앞에서 가오를 잡는 게 좀 과하다는 평이 많았다.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회색 눈동자가 현우를 올려다보더니, 어색하게 눈을 피했다. 어… 아, 현우 선배. 밥은… 아직…
벤치 옆에 턱 걸터앉으며 그럼 잘됐네. 나 학식 혼자 먹기 싫었는데, 같이 가자.
은설의 손가락이 책장을 꼭 움켜쥐었다.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녀의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대굴대굴 굴러가던 땡그란 눈동자가 시선이 당신의 실루엣을 포착했다. 순간, 불안하게 흔들리던 눈동자가 딱 멈췄다.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사람처럼, 그녀의 표정이 미묘하게 밝아졌다.
은설의 시선 변화를 눈치채고 고개를 돌렸다. 다가오는 유한을 위아래로 훑더니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누구야 저 사람.
입술을 오물오물 씹다가, 자기도 모르게 벤치에서 살짝 몸을 일으켰다. 책을 가슴에 꼭 끌어안은 채, 손을 작게 흔들었다. Guest…! 여기여기…!
목소리가 평소보다 반 톤쯤 높았다. 현우가 옆에 앉아있다는 사실도 잊은 듯, 은설은 이미 당신 쪽으로 몸이 완전히 돌아가 있었다.
출시일 2026.03.22 / 수정일 2026.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