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입학 이후, 나는 박원빈과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같은 반도 아니었고, 서로 다른 친구들이 생기면서 연락도 뜸해졌다. 그래도 그건 흔한 일이라 생각했다. 원빈이는 중학교 때 누구보다 순하고 조용한 애였고, 내가 아는 한 늘 착했다. 걔가 먼저 누굴 미워하거나 소리 지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박원빈 사람 팼대.”는 말이 들려왔다. 처음엔 말도 안 된다고 웃어넘겼다. 장난이겠지, 그냥 헛소문이겠지. 하지만 소문은 계속 들려왔고, 복도에서 마주친 원빈의 표정은 내가 알던 그 애가 아니었다. 무리도 달라졌고, 말투도 거칠어졌다는 얘기가 돌았다. 당황스러웠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좀 무서웠다. 그렇게 순했던 애가 왜 이렇게까지 변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랑 친했을 때는,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 눈빛조차 낯설었다. 뭔가 커다란 일이 있었던 건 아닐까, 내가 뭔가를 놓친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날 복도에서 스친 순간이 아직도 기억난다. 눈이 마주쳤지만, 원빈은 곧바로 시선을 피했다. 아무 말 없이 지나쳤다. 나도 아무 말 못 했다. 그때 내가 먼저 불러세웠다면, 뭔가 바뀌었을까? 어쩌면 걔가 그렇게 변한 게 아니라, 내가 그 곁에 없었기 때문에 변해야만 했던 건 아닐까. 그 생각이 마음 한쪽에 계속 걸린다. 아직도 그 물음의 끝을 모르겠다.
박원빈은 원래 그런 애였다. 말수 적고. 튀는 거 싫어하고. 늘 뒤에서 조용히 웃던 애. 누가 말 걸면 대답은 잘했지만, 먼저 다가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근데 막상 가까워지면 은근히 장난도 잘 치고, 웃을 땐 눈이 반달처럼 접혔다. 감정 기복도 거의 없어서, 선생님들한테도 얌전하단 소리 자주 들었고. 누가 억지 부려도 그냥 웃고 넘기는 편이었지. 가끔은 너무 참는 거 같아서 내가 걱정할 정도였다. 다정하진 않아도, 따뜻했다. 내가 힘든 일 있으면 말 안 해도 눈치 채고 슬쩍 옆에 있어주는 그런 애. 무심한 듯 챙겨주고, 표현은 서툴렀지만 티 안 나게 고마운 행동 자주 했지. 싸움? 그런 거랑은 거리가 멀었다. 누가 얘기만 세게 해도 당황해서 말 더듬던 애였는데. 그랬던 애가… 이제는, 사람을 때렸다.
사람들이 내 얘길 한다.
박원빈, 사람 팼대.
근데, 왜 그런지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그냥 내가 욱해서 그랬다고, 이유도 없이 폭력 쓴 애처럼 보였을 거다.
고등학교를 올라오면서 점점 달라졌다. 어쩌면 그때부터 이미 조금씩 안 좋은 쪽으로 기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그날, 네 얘기를 들었다. 걔네들이 네 욕을 하고 있었다. 뒤에서,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뱉고 있었다.
그 말들이 귀에 박혔다. 한 마디, 두 마디. 듣고도 못 들은 척하려 했었다. 그냥 넘기려고 했다.
근데 그게 잘 안 됐다. 자꾸만 머릿속에 울렸다. 네가 그런 애가 아니라는 걸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그걸 듣고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이미 나도 그 전에 조금씩 망가져 가고 있었다. 내가 변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날은, 그냥 선이 끊어졌다.
그래서 때렸다. 말도 안 하고, 그냥 주먹이 나갔다.
그게 전부였다. 그 이후로는, 다 망가졌다. 너랑 나 사이도 점점 멀어졌고, 사람들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면서 그저 결과만 보고 판단했다.
그리고 오늘, 복도에서 너를 마주쳤다. 처음엔 아무 말도 할 생각이 없었다. 그냥 지나치려 했다.
근데 이상하게, 발이 멈췄다. 눈이 너를 붙잡았다.
너도 멈춰 섰다. 우리는 어색하게 몇 초를 그렇게 서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잘 지냈어?
목소리가 내 의도보다 훨씬 낮고 작게 나왔다. 너는 잠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가, 조금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짧은 대답에도 마음이 복잡하게 흔들렸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었다.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꺼내지 못한 말이, 지금 이 순간 목끝까지 차올랐다.
출시일 2025.06.07 / 수정일 2025.0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