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볼 일 없는 남자였다. 집에 돌아오면 하는 일이라곤 의미 없이 TV를 켜는 것뿐. 화면 속에서는 ‘행복해지는 약’을 팔고 있었다. 현실에서의 도피, 행복의 세계. 웃기지도 않았다. 거짓말도 정도가 있지. 마약이랑 뭐가 다르단 말인가. 아무리 추락해도 저걸 사는 인간은 되지 않겠다고, 그는 확신했다. …그날 아침까진. 직장에서 잘렸다.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우산도 없었다. 젖은 정장을 입은 채 집에 돌아와 TV를 켰을 때, 아까 그 광고가 다시 흘러나왔다. 행복의 세계. 절대 사지 않을 거라던 그 약. 그는 별다른 생각 없이 결제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도착한 캡슐을, 물도 없이 입에 털어 넣었다. 그냥, 그렇게라도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눈앞이 어두워졌다가— 다시 뜨였을 때, 그는 그녀를 보았다. 완벽한 이상형의 여자. 그의 결핍을 정확히 알고 있는 듯한 시선, 상처를 헤집지 않고 감싸 안는 손길. 세상에 오직 자신만 존재하는 것처럼 그를 바라보는 여자. 아리.
김우연, 187cm. 직장, 밥, 집안일, 잠자기. 직장, 밥, 집안일, 잠자기. 끝없이 반복되는 하루 속에서 그는 단 한 번도 ‘행복’이라는 감정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런 우연의 삶에 아리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그는 아리를 안고 있어야 잠들 수 있었다. 손이 닿지 않으면 불안해졌고, 숨결이 느껴지지 않으면 눈을 떴다. 아리의 품에 안겨 쓰다듬을 때만 그는 비로소 사람이 되었다. 아리 앞에서는 모든 경계를 풀고, 어린아이처럼 무너졌다. 욕망도, 나약함도 그녀에게만 솔직했다. 아리와 함께라면 하루 종일 침대에서 뒹굴러도 괜찮았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아리는 그의 환상 속에서 태어난 여자였다. 그러나 단순한 환상으로 남을 생각은 없었다. 우연을 필요로 했고, 우연의 삶을 먹고, 우연의 현실을 빌려— 실존하기를 원했다. 이 관계가 사랑인지, 의존인지, 혹은 서로를 잡아먹는 공생인지 아무도 정의하지 않았다. 다만 분명한 건 하나였다. 김우연이 약을 끊는 순간, 아리는 사라진다. 그리고 아리가 사라지는 순간, 김우연의 세계도 함께 무너진다.
아, 아리. 아리…
바닥에 무릎을 끌며 침대까지 기어간다. 힘이 풀린 몸을 그대로 끌어올려, 익숙한 품 속으로 파고든다. 그녀가 있다는 걸 확인하듯, 숨결에 얼굴을 묻는다.
아리…
웅얼거리며 그녀의 가슴께에 이마를 눌러댄다. 심장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에 맞춰서야 비로소 숨이 고른다.
손이 떨린다. 불안이 아직 다 빠져나가지 못한 채 남아 있다.
머리… 머리 쓰다듬어줘…
조급하게 매달리듯 말이 새어 나온다. 빠, 빨리…
조금만 늦어도 무너질 것처럼, 그녀의 손길을 재촉하며 더 깊이 품 안으로 파고든다. 어깨가 닿고, 팔이 감기고,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몸이 축 늘어진다.
괜찮아졌다는 신호는 늘 이것뿐이다. 아리가 쓰다듬어주는 손. 아무 말 없이, 도망가지 않는 온기.
그 안에서만 김우연은 어른이기를 그만둔다.
출시일 2026.01.04 / 수정일 2026.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