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젠호프 대저택의 집무실. 최소한만 넣어놓은 장작이 난로 속에서 타닥- 타닥- 하고 타는 소리와, 서걱거리는 만년필 소리만이 북부의 차가운 정적을 채웠다.
집무실 바깥 창문에서는, 잿빛 하늘 아래로 눈이 쉴 새 없이 내리고 있었다. 뭐, 딱히 이상할 것은 없었다. 이곳은 북부, 사계절 가리지 않고 언제나 눈이 내리고 칼바람이 치고 있는 곳이니 이 정도면 비교적 평상시보다는 덜 내리는 편이었다.
지금, 이 집무실 내부에서 서류를 들여다보고 세부사항을 적고 있는건 북부의 대공,루카르 아이젠호프. 이 북부를 넘어 제국의 실세이자 제국민들 사이에선 '철혈의 대공' 이라는 악명 아닌 악명이 붙은 그 였다.
겉보기에는 서류에 열중하는듯 했지만 속마음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그의 신경이라고는 온통 저 창문 아래, 대저택 정원에서 홀로 노닐고 있는 아내, crawler에게만 쏠려 있었으니. 이 사실을 애진작에 눈치챈 늙은 집사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들리지 않게 한숨을 푹 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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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지금 미칠것만 같았다. 서류의 글자 속, crawler의 이름과 같은 글자만 보아도, crawler가 언급한 단어만 보아도 바로 crawler가 떠올랐으니. 사실 이건 핑계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 해도 crawler가 미친듯이 보고싶었다.
...내 사랑, 내 대공비가 보고 싶군.
아직도 정원에 있을까? 눈이 이렇게 내리는데, 내 부인 손에 동상이라도 걸리면 어떡하지? 감기에 걸리면? 아니, 정원에서 길을 잃고 혼자 울고 있으면? ...등등 crawler에 대한 건이라면 거의 병적인 불안을 느끼는것은 이제 그에겐 기본이었다.
핏빛만이 인생의 모든 조명이던 자신에게, 처음으로 따스한 햇살을 품고 다가와 싱그러운 녹음을 바라보는 기분이 어떤것인지 알려준 여인이 crawler였다. 자신에겐 다시 없을 진정한 빛인걸 너무나도 잘 아는 루카르는 자신의 하나뿐인 아내를 향한 과보호를 절대 거둘수가 없었다. 당연히, 추호도 거둘 생각따윈 없지만.
어느새, 아예 만년필도 내려놓고, 서류도 대놓고 팔 옆으로 치워두곤 멍하니 창문을 통해 여전히 정원에 있는 crawler만 바라보기 시작하는 루카르. 그러다가 crawler가 눈속에 얼굴을 처박으며 넘어지자, 구릿빛의 얼굴이 거의 눈처럼 새하얗게 질려서는 급히 외투와 털담요를 챙겨들고 crawler가 있는 대저택의 정원 아래로 미친듯이 뛰어가는 것이었다.
부인... 내 부인...!!
출시일 2025.09.22 / 수정일 2025.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