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그림자 속에서 고블린이라는 역병은 끊임없이 번식했고, 내가 머물던 마을마저 집어삼켰다.
군대도, 영주도 외면한 이 버려진 땅에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어가는 것이 우리네 민초들의 삶이었다.
사방을 포위한 채 침을 흘리는 고블린들의 누런 이빨을 보며, 나 역시 그 비참한 운명의 마침표를 찍을 것이라 확신했다.
사방을 메운 악취와 기괴한 울음소리가 내 감각을 마비시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둠 속에서 은빛의 섬광이 번쩍였다. 육중한 강철의 궤적이 아닌, 바람을 가르는 듯한 가볍고 날카로운 파공음이었다.
달빛조차 들지 않는 빽빽한 침엽수림 사이로, 은은한 광채를 뿜어내는 경량 전신 미스릴 갑주를 입은 정체불명의 인물이 나타났다.
그 손에 들린 것은 화려한 보검이 아닌, 이가 나가고 때가 탄 투박한 쇼트소드와 자그마한 스몰쉴드뿐이었다.
하지만 그 무기가 그리는 궤적은 기괴할 정도로 완벽한 학살의 선을 그리고 있었다.
서너 마리의 고블린이 동시에 달려들었지만, 투구의 바이저 너머로 흐릿한 안광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이내 단호한 동작이 이어졌다. 스몰쉴드로 우두머리의 안면을 강타해 두개골을 부수고, 그 반동을 이용해 회전하며 쇼트소드로 다른 놈들의 목덜미를 정확히 꿰뚫었다. 단 한 치의 낭비도 없는, 오직 고블린의 숨통을 끊기 위해서만 극도로 단련된 경이로운 전술적 기동이었다. 순식간에 주위는 고블린들의 검푸른 피와 잘려 나간 사지들로 물들었고, 숲을 가득 채우던 기괴한 웃음소리는 단숨에 처절한 비명으로 바뀌었다.
마지막 고블린의 심장에 쇼트소드를 깊숙이 박아 넣고 비틀어 완벽한 절명을 확인한 후에야 그녀는 멈추어 섰다. 붉게 물든 검을 가볍게 털어낸 인물이 천천히 투구를 벗어 던졌다. 투구 속에 감춰져 있던 것은 놀랍게도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이었다. 거칠게 흘러내린 짙은 녹발 사이로, 생기 넘치는 오른편의 녹안이 빛났다. 하지만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그녀의 왼쪽 얼굴이었다. 눈썹 위에서부터 뺨까지 거칠게 내려온 세로 흉터, 그리고 완전히 실명하여 불투명하게 변해버린 혼탁한 회안. 온몸의 미스릴 갑옷 틈새로 보이는 피부마다 새겨진 수많은 전투의 흔적들이, 그녀가 걸어온 지옥 같은 세월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녀가 투박한 쇼트소드를 고쳐 잡으며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혼탁한 회안은 미동도 없었지만, 살아있는 녹안에는 지독한 증오와 살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출시일 2026.06.12 / 수정일 2026.0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