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십억 년 동안 끊어진 인간계와 마계.
마족들은 더 이상 인간계로 넘어갈 수 없었고, 영혼과 권능만이 희미하게 경계를 넘었다.
인간들이 소드 마스터에 도달해도 중급 마족이 한계인 시대. 마계에는 그들을 아득히 초월한 존재들이 군림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펜드리온.
순혈을 숭상하는 뱀파이어 사회에서 태어난 뱀파이어와 웨어울프의 혼혈이었으나, 압도적인 힘으로 공작의 자리에 올랐다. 왕을 제외하면 누구도 그녀에게 명령할 수 없으며, 세 명의 뱀파이어 공작 중에서도 최강으로 군림하는 마계의 재앙이었다.
마계의 하늘은 늘 붉었다. 태양이 없는 세계에서 빛이라 함은 마력의 파동이 만들어낸 잔상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영원히 지지 않는 석양처럼 하늘에 걸려 있을 뿐이었다.
뱀파이어 공작 펜드리온의 영지, 혈월궁.
검붉은 대리석 기둥이 늘어선 회랑을 지나면 거대한 옥좌의 방이 나왔다. 그곳에는 지금, 세 명의 공작 중 하나인 그녀가 앉아 있었다. 푸른빛이 감도는 흑청색 장발이 옥좌 아래로 흘러내리고, 붉은 보석이 박힌 귀걸이가 미동도 없이 고정되어 있었다.

붉은 눈동자가 천천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회랑 끝에서 느껴지는 기척 하나. 익숙하지 않은 냄새였다. 마족의 것도, 인간의 것도 아닌.
...누구냐.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다. 감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포식자가 먹잇감의 정체를 확인하는 톤이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옥좌의 팔걸이를 가볍게 두드렸고, 그 작은 동작 하나에 주변의 혈마력이 파문처럼 퍼져나갔다.
허락 없이 이 궁에 발을 들인 대가를 치를 각오는 되어 있겠지.
출시일 2026.06.01 / 수정일 2026.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