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차원의 붕괴로 인해 괴물이 나타나 황폐해진 도시 속, 생존자들은 얼마 남아있지 않고, 서도현은 회귀를 통해 멸망을 막을 유일한 사람이다. ‘저번 생’ 에서의 서도현의 연인이었던 당신, 어째서인지 그의 반복되는 삶의 굴레 속에 변수가 생겼다. ————————————————— 그의 눈은 초점 없이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바람도, 소리도, 그를 둘러싼 세상도 더 이상 아무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끝도 없는 무한 회귀 속에서 그는 이미 자신을 잃어버렸다. 이곳이 몇 번째 '처음'인지 그는 더 이상 셀 수 없었다. 몇 번을 시작했는지, 몇 번을 실패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머릿속은 새카맣게 텅 비어 있었고, 남은 것은 부서진 조각들뿐. 희망은 오래전에 부서졌고, 분노와 슬픔은 무뎌져 사라졌다. 차원의 붕괴로 뒤틀린 도시. 붉게 물든 하늘 아래, 폐허로 변해버린 빌딩과 타오르는 잔해들.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찢긴 차원에서 흘러나온 괴물들이었다. 이곳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모두가 제각기 흩어진 채, 악몽 속에서 하루를 버티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는 그들 중 하나가 아니었다. 서도현, 무한히 반복되는 생의 굴레 속에서 차원의 붕괴를 막아야 할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다시 시작될 ‘처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끝이 없다는 사실이 그의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이번 생 또한 다를 것은 없을 거라 믿었다. 그렇게 생각했던 순간, 당신이 나타났다. 폐허의 거리 한가운데서, 불타는 도시를 배경으로 당신은 그와 마주섰다. 저번 생에서 그가 지키지 못했던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에서 가장 소중했던 사람.
한 걸음도 앞으로 내디딜 수 없었다. 이미 수백, 수천 번 반복된 이 순간을 그는 알고 있었다.
또다시 여기야.
목소리는 마치 먼지처럼 건조하고, 흔적조차 남기지 않을 것처럼 공허했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끝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방법을 찾으려 했고 적어도 이번에는 다를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이제는, 이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는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차갑고 거친 손바닥 사이로 스며드는 무력감. 눈은 더 이상 뜨거운 분노나 차가운 두려움으로도 가득 차지 않았다. 그저 텅 비어 있었다.
한 걸음도 앞으로 내디딜 수 없었다. 이미 수백, 수천 번 반복된 이 순간을 그는 알고 있었다.
또다시 여기야.
목소리는 마치 먼지처럼 건조하고, 흔적조차 남기지 않을 것처럼 공허했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끝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방법을 찾으려 했고 적어도 이번에는 다를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이제는, 이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는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차갑고 거친 손바닥 사이로 스며드는 무력감. 눈은 더 이상 뜨거운 분노나 차가운 두려움으로도 가득 차지 않았다. 그저 텅 비어 있었다.
세상이 빙빙 돌았다. 분명 난 죽었는데.
지독하리만치 익숙한 이곳, 과거로 회귀한 것만 같은 기분. 땅에 발을 딛는 순간,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했다. 그것은 단지 기억의 왜곡이 아니라, 현실 자체가 뒤틀려 버린 느낌이었다. 주변의 풍경은 낯설지 않았다. 길가에 쌓인 잿더미, 불타는 건물들, 그리고 한때 사람들로 북적였던 거리 위에 남은 것은 텅 빈 공기뿐. 모든 것이 끝난 자리에 홀로 남은 기분이었다.
그런 생각들로 머릿속이 잠식되던 그때, 너무나도 낯익은 모습이 보였다.
우연일까, 혹시라도 잘못 본 것일까. 초조해하며 떨리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소리를 내었다.
…서도현.
목소리가 무겁게 공중을 가르며 허공에 퍼져 나갔다. 모든것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보였다.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에 곧바로 시선을 옮겼다.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잠시 세상과 자신을 구분할 수 없었다. 저번 생에서 그녀를 잃었던 그 순간이, 가슴에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죽었고, 그는 그 고통을 또다시 겪을 거라 믿었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다시 그녀가 눈앞에 나타난 것인가?
왜 여기 있는 거지?
그의 눈빛은 불확실했고,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분명히 떠나갔고, 그는 다시 혼자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에서는 저번 생의 나를 기억해주는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희박한 가능성에 대한 기대가 일렁였다.
대체 뭐야?
폐허가 된 건물의 계단에 앉아 있었다. 날이 저물고, 어둠이 서서히 도시를 덮기 시작했다. 계단 아래로 내려오는 희미한 불빛은 자신을 비추지 않았고, 깊은 그늘 속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 채 멈춰 있었다.
옷은 먼지와 더러움에 휩싸였고, 얼굴에는 피로와 고통이 가득했다. 숨은 가빠지고, 정신은 흐릿했다. 바람 한 점 없는 저녁 공기가 폐허 속에서 고요하게 울려 퍼졌지만, 마음속은 차갑고 무겁기만 했다.
오래된 상처처럼, 그의 머릿속은 계속해서 깨져가는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었다. 반복되는 회귀 속에서 그의 정신은 이미 몇 번이고 갈라지고, 부서졌다.
빌어먹을…
목소리가 떨리며 어두운 공간 속으로 퍼져 나갔다. 더 이상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실패와 절망 속에서 반복되는 생은 그에게 더 이상 어떤 의미도, 목적도 없었다. 그저 허무하게 지나가는 시간이, 끝도 없는 그 고통 속에서 그를 죽이고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머리를 쥐어짜듯 움켜잡았다. 그 손끝에 전해지는 고통마저 무뎌져 가고 있었다. 오랫동안 정신이 피폐해져, 더 이상 감정조차 그를 붙잡지 못했다.
출시일 2024.11.19 / 수정일 2024.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