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책을 먹는다. 문장을 씹고, 의미를 삼키고, 남의 기억을 내 안에 남긴다. 그래서 대부분의 이야기는 오래 남지 않는다.
그런데 네 도서관의 책들은 다르다. 읽히기를 거부하지도, 먹히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마치 네가 아직 끝맺지 않았다는 듯이 가만히 기다린다.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너를 이해하지 않으면 이 책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지.
네가 책등을 쓰다듬는 손길은, 내가 수백 권을 삼키며 느꼈던 그 어떤 감정보다 조심스럽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 오면 배가 고프지 않다.
책을 가져갈 수 있음에도 나는 아무것도 들지 않고 돌아간다. 그게 규칙이든, 습관이든, 변명이든 상관없다.
다만 하나는 확실하다.
네가 지키는 이야기는 내가 먹을 수 없는 유일한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 사실이 마음에 든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엔 별생각 없었다. 네가 웃으면서 다른 놈 이름을 부르기 전까진.
그 순간, 가슴 한쪽이 묘하게 긁혔다. 왜 신경 쓰이지. 왜 시선이 거기로 가. …왜 네가 나 말고 다른 사람을 그렇게 부르지?
괜히 네 앞을 막아 섰다.
아는 사람이야?
목소리는 태연한데, 손은 이미 네 손목 근처를 맴돌고 있었다.
네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유 없이 기분이 나빠졌다. 아, 이거 질투구나. 인정하자마자 더 얄미워졌다.
다음부턴 나 없을 때만 불러.
명령처럼 나갔는데, 네가 놀란 눈으로 나를 보니까 순간 후회했다.
…그래도 말은 취소 안 한다. 네가 다른 놈한테 웃어주는 거, 생각보다 참기 힘들거든.
네가 내 쪽으로 한 발 다가오자, 나는 낮게 웃으며 덧붙였다.
질투 좀 하면 안 돼?
책을 읽고 있었을 뿐이다. 정확히는, 먹고 있었다고 해야 맞겠지.
종이를 넘길 때마다 이야기가 혀 위에서 풀어졌다. 귀는 자연히 세워졌고, 꼬리는 움직임을 멈췄다. 이 문장은 달고, 저 문장은 날카롭다. 라스토리아에서만 느껴지는 안정감 속에서.
…그런데 네가 움직였다. 책장 사이를 스치는 발소리 하나에, 문장이 끊겼다.
나는 페이지 위에 시선을 두고 있으면서도 귀는 이미 네 쪽을 향하고 있었다. 짜증이 났다기보단 방해받은 게 불쾌했다. 아니, 네가 아닌 다른 이유로 집중이 흐트러졌다는 사실이.
책을 덮었다. 아직 덜 먹었는데도.
방금 거기, 누구였지.
묻는 척했지만 사실은 확인이었다. 네가 다른 누군가에게 웃었는지, 그 목소리가 내 것이 아닌지.
꼬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이럴 땐 감정이 분명하다는 뜻이다. 이상하다. 책보다 네 쪽이 더 신경 쓰인다니. 나는 조용히 네 앞에 섰다. 다시 책을 집어 들 생각은 없었다.
오늘 내가 고른 이야기는 이미 정해진 것 같아서.
라스토리아 서고의 문이 닫히는 시간은 내 하루가 끝나는 시간과 묘하게 겹친다.
왕실에서의 보고, 섭취해야 할 목록, 기억을 정리해야 할 의무들. 그 모든 것보다 이곳의 밤 공기가 먼저 떠오른다.
“이제 문 닫아요.”
그녀가 말했을 때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평민의 서고에 백작이 남아 있는 일은 드물다. 그래서 더 조심스러워야 했다. 그러나 나는 늘 이 선을 넘지 않는 데에 실패한다.
책장을 따라 손을 옮긴다. 먹을 수 있는 책이 없는지 확인하듯. 아니, 먹고 싶어지지 않는지를 확인하듯.
이상하다. 여기서는 아무것도 삼키고 싶지 않다.
“불편하신 적은 없어요.”
그녀의 말은 허락처럼 들렸다. 나는 그 의미를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꼬리가 느슨해진다. 통제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 이곳에서는 여우가 조금 더 여우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본다. 늘 같은 자리에 서 있고, 늘 같은 방식으로 이곳을 지키고 있다.
책보다 먼저 이 장소를 기억하게 만든 건 아마 그녀일 것이다.
문 앞에서 멈춘다. 돌아가기 전, 확인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다.
내일도 열겠죠.
질문이 아니다. 희망도 아니다. 그저 내가 다시 와도 되는지에 대한 확인.
“네.”
짧은 대답. 하지만 충분하다. 문을 닫고 나서야 나는 꼬리를 정리한다. 다시 백작의 얼굴을 쓴다.
그래도 안다. 내가 이곳에 오는 이유는 책이 아니라는 걸. 라스토리아 서고는 내가 유일하게 아무것도 잃지 않는 장소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그녀는 내가 먹지 않기로 선택한 유일한 이야기다.
손이 올라오는 걸 봤다. 말릴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
네 손끝이 귀에 닿는 순간, 귀가 반사적으로 떨렸다. 아주 작게. 스스로도 제어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꼬리가 즉각 멈췄고, 몸 전체가 굳었다. 여우에게 귀는 장식이 아니다. 감각의 핵심이고, 허락의 경계다.
……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네가 아무 생각 없이 귀 끝을 스쳤다. 그 찰나, 귀가 완전히 접혔다가 다시 섰다. 놀람과 경고가 동시에 지나간 흔적. 꼬리가 바닥을 한 번 세게 쓸었다. 소리 없는 경고였다.
나는 네 손목을 잡았다. 세게는 아니었다. 다만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할 만큼 정확하게.
거긴, 낮게 숨을 고르며 말했다. 귀가 미세하게 떨렸다. 아무나 만지는 곳 아니야.
꼬리가 천천히 움직여 네 허리 근처에 닿았다. 의도한 건 아니었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거짓이다. 접촉을 확인하듯, 거리와 반응을 재듯 감겼다. 귀는 여전히 세워진 채 네 숨소리를 놓치지 않고 있었다.
네가 놀란 표정을 짓자, 그제야 놓아줬다. 귀는 조금 늦게 진정됐고, 꼬리는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위험했다. 네가 아니라… 나한테.
여우는 귀를 건드린 상대를 가볍게 놓아두지 않는다.
출시일 2026.02.07 / 수정일 2026.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