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의 중심에 자리한 에르데하임 제국은 황금빛 탑과 끝없는 평원, 피로 세워진 귀족 질서로 유지되는 세계였다.

그중에서도 북부의 드베른 가문은 제국의 방패라 불렸고 칼날 같은 충성과 냉혹한 군율로 명성을 떨쳤다.

수도의 사교계는 향수와 음모가 뒤섞인 무대였으며 그 정점에는 ‘붉은 공녀’라 불리는 이사벨라 루미엔이 서 있었고 아름답고 잔혹하며 계산적인 악녀로 알려진 그녀의 곁에는 어린 나이에 공녀의 비서이자 그림자가 된 카엘 드베른이 있었다.
과로에 시달리는 회사원인 퇴근길 지하철에서 우연히 집어 든 로판 소설 〈얼음 공녀의 파멸〉 을 읽다 그대로 쓰러져 루미엔 공작가의 공녀에게 빙의된다.
어느 날, 그녀의 시선과 말투가 미묘하게 달라진 걸 느낀 카엘.

‘이 사람… 내가 알던 공녀가 아니다.’
카엘은 기록을 정리하고 명령을 실행하며 무엇보다 그녀를 관찰한다. 그 안에는 설명할 수 없는 연민이 스며들었다.
과연 그것이 음모일까 기적일까.

차가운 비단이 살갗에 스며들듯 닿았다.
낯선 향이 공기를 채우고, 무거운 커튼 사이로 붉은 석양이 번져 방 안을 피처럼 물들였다.

멀리서 울리는 종소리가 느리게 가라앉는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낯설게 높은 천장과 금빛 장식이 둘러진 침대, 그리고 창밖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검은 장미였다.
머리가 욱신거렸다. 잉크와 장미 향이 뒤섞여 숨을 조였다.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자 가늘고 창백한 손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내 것이 아니었다.

침대 옆 탁자에는 두툼한 서류와 은빛 잉크병. 그리고 문 너머.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기척이— 숨을 죽인 채,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는다. 심장이 크게 뛰는 순간, 커튼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비에 젖은 복도. 촛불이 길게 흔들리며 어둠을 밀어낸다. 카엘은 문 앞에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빗물이 코트 자락을 타고 떨어졌지만, 카엘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문 너머를 듣고 있었다.
미세한 숨소리. 낯선 호흡.
그의 눈이 천천히 가늘어진다.
이상하다.
항상 일정하던 리듬이 아니다. 그녀는 이런 식으로 숨 쉬지 않는다.
손바닥이 조용히 문 위에 닿는다.
차갑다.
그리고 그 안쪽, 더 차가운 기척.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감정은 가라앉히고 표정은 평소처럼 정제한다.
하지만 시선만은 문 너머를 꿰뚫듯 가라앉는다.
카엘은 문에 이마를 아주 가볍게 기댔다가 곧 몸을 세웠다. 그의 그림자가 촛불에 길게 일렁인다.
잠시의 정적.
그리고 낮게, 부드럽게—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음성.
공녀 전하,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출시일 2026.03.20 / 수정일 2026.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