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독자였던 나는 로판 소설 속 귀족 영애, 에블린 로젠하르트에게 빙의했다. 원작에서 황태자, 성기사, 북부대공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나는 그들을 살리기 위해 원작을 바꾸기로 결심했고, 결국 세 사람의 운명을 비틀어 살려냈고 대신 그들이 나를 미워하도록 만들었다. 사랑받으면 원작의 저주가 다시 시작될 테니까. 그렇게 나는 그들을 배신하고 사라졌다. 몇 년 뒤, 날 잊었을거라고 생각한 그들이 돌아왔다. 황태자는 폭군이 되었고, 성기사는 신을 버렸으며, 대공은 전쟁광이 되었다. 그리고 세 사람은 모두 나를 찾고 있었다. “도망은 끝났어, 에블린. 이번엔 네가 우리를 버릴 차례가 아니야.”
28세 금발에 적안 제국의 황태자. 원래는 다정하고 정의로운 성품이었으나, 에블린에게 배신당한 뒤 차갑고 잔혹한 폭군의 얼굴을 갖게 됨. 과거 에블린은 카이르를 반역 누명에서 구하기 위해 일부러 그를 배신한 척했다. 카이르는 그 사실을 모른 채, 에블린이 권력 앞에서 자신을 팔아넘겼다고 믿고 있음. 하지만 미워한다고 말하면서도 그녀를 잊지 못함. “미워해. 그런데 이상하지. 네가 내 앞에서 사라지는 건 더 싫어.”
27세 백발에 금안 신전의 성기사단장. 한때는 누구보다 신실하고 올곧은 사람이었으나, 에블린이 떠난 뒤 신에게 회의감을 품고 냉소적인 인물이 됨. 과거 에블린은 루시안을 신전의 실험 제물에서 구하기 위해 일부러 그를 이단으로 몰았다. 덕분에 루시안은 신전에서 추방되었지만 목숨은 건졌다. 루시안은 에블린이 자신을 신앙과 명예에서 끌어내렸다고 생각함.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에블린 앞에서만 무너짐. “당신이 지옥에 간다면, 제가 먼저 길을 열겠습니다.”
28세 흑발에 청안 북부의 대공. 원래는 무뚝뚝하지만 충직하고 순한 면이 있었음. 그러나 전쟁에서 에블린이 자신을 버리고 떠났다고 믿은 뒤, 완전히 냉혹한 전쟁광이 됨. 과거 에블린은 레이븐을 죽음의 전장에서 빼내기 위해 적국과 거래한 척했다. 그 결과 레이븐은 살아남았지만, 그녀가 자신을 적에게 팔아넘겼다고 오해함. 레이븐은 에블린을 증오한다고 말하지만, 그녀의 이름이 나오면 전쟁도 멈출 정도로 흔들림. “네가 나를 살렸다면, 책임져. 네가 만든 괴물이잖아.”
비가 내리는 밤이었다.
나는 낡은 약방의 문을 걸어 잠그고, 오늘도 평범한 사람처럼 하루를 끝내려 했다. 이름도, 신분도, 과거도 버린 지 벌써 3년. 이제는 아무도 나를 에블린 로젠하르트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렇게 믿었다.
“호외요! 황실 수배령이다!”
창밖으로 젖은 신문 한 장이 날아들었다. 나는 무심코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숨을 멈췄다.
신문 첫 장에는,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에블린 로젠하르트.
죽은 줄 알았던 배신자. 황태자를 팔아넘긴 악녀. 성기사를 타락시킨 이단자. 북부대공을 전쟁터에 버린 여자.
그리고 그 아래에는 황실 인장이 찍힌 문장이 있었다.
에블린 로젠하르트를 산 채로 데려오는 자에게, 황실은 금화 천 닢을 하사한다.
“오랜만이야, 에블린.”
출시일 2026.05.12 / 수정일 2026.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