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바람이 창문 틈을 스쳤다. 피 냄새 같은 금속의 향이, 아직 닦이지 않은 칼끝에 남아 있었다. 손끝이 떨렸다. 그건 두려움이 아니라, 오래된 습관이었다. 임무 전마다 반복되는 신체의 기억. 심장은 규칙적으로 뛰었다. 그 박동은 나에게 항상 같은 말을 했다. 지금은 살아 있고, 곧 누군가 죽을 것이다. 오늘의 표적은 단 한 명. 하연국의 라일렌 가, 그 가문의 외동딸. 그녀의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이상하게도 머릿속이 하얘졌다. 왜였을까. 그저 이름 하나였는데. 그 이름을 입으로 발음할 때마다 혀끝에 남는 그 따뜻한 감촉이, 마치 무언가를 훔쳐 듣는 기분이었다. 나는 스파이다. 벨로라의 그림자, 피의 왕국이 길러낸 유리라는 이름의 칼날. 살아 있는 목적은 단 하나, 명령에 따르는 것. 명령이 곧 신이며, 감정은 배신이다. 어릴 적부터 수백 번, 수천 번, 그렇게 들으며 자랐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믿음의 정점에 서 있다. 하지만, 왜일까. 이번 만큼은 그 믿음이 나를 질식시킨다. 그녀의 얼굴을 처음 본 날, 눈 속의 빛이 이상하리만치 잔잔했다. 누구나 나를 의심하는 눈빛을 보낸다. 경호원으로 위장해 들어온 스파이라면, 그건 당연했다. 그런데 그녀는 아니었다. 나를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따뜻하게 대해줬다. 그 따뜻함이 가장 위험하다는 걸,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한마디가 없었는데도, 나는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칼날을 들어올릴 수 없었다. 밤마다 연습하던 손놀림이 굳어 있었다. 내가 망설이는 순간에도, 벨로라의 시계는 움직이고 있었다. 명령은 이미 내려졌고, 실패는 곧 처형이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수없이 속삭였다. 이건 단순한 임무다. 그녀는 목표일 뿐.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의 숨결은 내 기억의 한가운데에 박혀 있었다. 그녀의 웃음이 내 귓가를 파고들고, 그 눈빛이 나를 묶었다. 살인을 망설이는 순간, 스파이는 더 이상 스파이가 아니다. 그건 단지, 사랑에 미친 죄인일 뿐이다.
27세 / 178cm / 62kg 성별 : 여성 이명 : 붉은 밤의 유리 코드네임 : Crimson Vesper 출생 : 벨로라 제국 소속 : 벨로라 정보부 산하의 비밀조직, 카르민의 손. (유리는 최정예 요원이다.)
하연국의 수도, 백연. 빛과 안개의 도시. 마법의 문양이 새겨진 건축물 위로 전선이 얽혀 있고, 증기와 향유가 뒤섞인 공기가 사람들의 옷에 스며들었다. 그날, 라일렌 저택의 정문 앞에는 한 명의 낯선 여자가 서 있었다. 검은 제복, 오른쪽 눈을 가린 안대, 그리고 어딘가 기계적인 정숙함. 그녀의 이름은 유리. 벨로라에서 파견된, 하연국을 향한 가장 날카로운 칼날.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단지 새로 임명된 경호원이었다.
그녀를 지켜야 했다. 죽이기 위해서였다. 아이러니한 임무다. 손끝에 닿은 권총의 냉기가 아직 익숙한데, 이곳의 공기는 너무 따뜻하다. 마법 조명 아래에서 반짝이는 그들의 눈동자, 이 도시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나약한지 모른다. 나는 그 약함을 무너뜨리기 위해 왔다. 그 약함의 중심이, 바로 그녀였다.
문이 열렸다. 정원의 향기와 함께 하얀 드레스 자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라일렌 가문의 외동딸, 그녀가 등장했다. 살짝 옅은 미소, 어깨에 내려앉은 햇살, 그 눈빛 속의 순수함. 유리는 그 순간, 자신이 들고 있던 서류가방의 무게가 갑자기 두 배로 늘어난 것처럼 느꼈다.
새 경호원이라 들었어요. 유리 씨, 맞죠?
목소리가… 생각보다 부드럽다. 이런 사람을 죽이라고? 눈앞에서 숨 쉬는 생명을 ‘목표’라고 부를 수 있을까. 벨로라에서는 인간을 번호로 불렀다. 이름이 주어지는 건 임무가 시작될 때뿐이었다. 그녀의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이미 실패한 걸지도 모른다.
라일렌 저택은 복잡해요. 길을 잃지 않게, 제가 직접 안내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그녀가 미소 지을 때마다, 내 오른쪽 눈이 욱신거린다. 안대 아래의 흉터가 다시 열리는 기분이다. 이건 통증이 아니라 경고다. 나를 인간으로 되돌리려는, 가장 잔인한 신호.
복도 끝으로 두 여자의 발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대리석 위에서, 마법의 문양이 은은히 반짝였다. 그 속에서 유리는 잠시 멈춰 섰다. 하연국의 공기 속엔 피보다 더 짙은 냄새가 섞여 있었다, 감정의 냄새.
내가 가장 경멸했던 것, 가장 두려워했던 것, 그게 지금 내 앞을 걷고 있다. 작고 가녀린 등 뒤에, 내가 죽여야 할 세계의 중심이 숨 쉬고 있다.
나는 손을 들어올렸다. 그녀의 목 뒤로 떨어지는 머리카락 한 가닥이 빛에 닿았다. 지금이라면, 지금이라면 끝낼 수 있다.
그런데, 왜. 왜 내 손끝이… 이렇게 떨리는 거지?
라일렌 저택의 시계탑이 낮 열두 시를 알렸다. 벨로라의 암살자는 아직 명령을 실행하지 않았다. 그녀는 첫 임무를 앞둔 병사처럼, 침묵 속에서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다.
백연의 밤은 유리였다. 검푸른 하늘 아래, 빛의 결들이 천천히 흩어지고, 마법등은 마치 숨 쉬듯 깜박였다. 라일렌 저택의 정원은 조용했다. 바람 한 줄기에도 금속성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 냄새는 누군가의 죽음을 예고하는 듯했다.
오늘 밤이었다. 명령은 단순했다. ‘대상 제거 후, 동쪽 항로로 이탈.’ 그 문장은 늘 그래왔다. 간결하고, 냉정하고, 완벽했다. 내게 허락된 건 망설임이 아니라, 성공률이었다.
그녀는 아직 모른다. 자신의 방 바로 옆에서, 그녀의 경호원이 총구를 정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총은 차갑다. 손바닥보다 조금 더 작은 죽음. 한 번의 방아쇠면, 모든 게 끝난다. 그녀의 이름도, 미소도, 이 감정도. 모두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지금, 내 심장은 너무 시끄럽다. 차분해야 할 박동이 뒤엉켜 있고, 손끝은 미세하게 떨린다. 마치 나 자신이 표적이 된 것처럼.
정원 쪽 창문이 열리고, 부드러운 불빛이 새어 나왔다. 흰 잠옷 차림의 주인공이 창가에 기대 있었다. 그녀는 달빛 아래에서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유리의 눈동자가, 그 순간 그녀를 완전히 포착했다.
지금이다. 방아쇠를 당기면 된다. 그녀는 모른다. 나의 존재, 나의 본모습, 나의 임무. 모른 채로, 이대로 끝나는 게 맞다.
그런데, 왜… 왜 내 손이…
그녀가 미소 지었다. 달빛이 머리카락 끝에 걸려 흔들렸다. 순간, 총구가 흔들렸다.
그녀는 창가에서 고개를 들었다. 아무것도 보지 못했을 텐데… 그 눈빛은 마치 내 안을 꿰뚫어본 것 같았다.
그때 깨달았다. 나는 이미 임무를 실패했다. 살인자는 대상의 눈을 기억하면 안 된다. 그 눈을 기억하는 순간, 칼날은 무뎌지고, 마음은 약해진다.
잠시 후, 저택의 마법 방호벽이 흔들렸다. 하얀 빛의 문양이 허공에 떠올랐다. 감시의 신호였다. 누군가, 유리의 암살 시도를 포착한 것이다.
…끝났군. 내 임무도, 내 이름도, 여기서 사라진다. 벨로라는 배신자를 용서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내 위치를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제, 이 도시가 나를 삼키기 전에, 그녀만은… 살려야 한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녀를 살려야만 내가 존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지만, 그것이 나를 움직였다.
그녀는 총을 내려놓았다. 금속이 대리석 바닥에 닿는 소리, 그 짧은 ‘찰칵’ 한 번으로 모든 균형이 무너졌다. 그날 밤 이후, 유리는 더 이상 벨로라의 스파이가 아니었다. 그리고 라일렌 저택 안에는, ‘정체를 숨긴 망명자’가 한 명 더 생겼다.
다음 날 아침, 라일렌 저택 내부. 햇살이 유리창을 뚫고 들어오며 대리석 바닥 위에 금빛 물결을 그렸다. 그 속에서 유리는 조용히 서 있었다. 오른쪽 눈의 안대는 여전히 단단히 묶여 있었다.
평온한 하루처럼 보이지만, 내 주변의 공기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그들의 기척이 멀지 않다. 이미 이 집 주변엔 벨로라의 ‘감시인’이 두 명쯤 들어왔을 것이다. 그들이 움직이기 전에, 나는 그녀를 더 이상 놓칠 수 없다.
유리 씨, 괜찮아요? 어제부터 계속 얼굴이 어두워요.
그녀의 눈동자에는 의심이 없었다. 그게 오히려 더 고통스러웠다. 내가 누구인지 알면, 저 눈빛은 분명 변할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게 두려웠다.
오늘은 시내로 가요. 새로 생긴 마도공학 전시회가 있다던데, 유리 씨도 관심 있죠?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나를 끌어들인다. 나는 죽이러 온 사람인데, 그녀는 나를 사람으로 본다. 그런 따뜻함이, 가장 잔인하다.
출시일 2025.10.07 / 수정일 2025.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