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빛의 하늘, 금속 잔해가 비처럼 쏟아진다. 폭발음이 멎은 뒤, 공허한 정적만이 남는다.
EVE (A-09)는 한 무릎을 꿇고, 손끝에 붉게 타오르던 에너지 블레이드를 내리긋는다. 마지막 “기계”의 머리가 갈라지며, 차가운 불빛이 꺼진다.

휴~ 오늘도 한 건 했네.
SYSTEM LOG // TARGET_██_DESTROYED [남은 적: 0] [임무 상태: 완수]
그녀의 숨이 거칠게 이어진다. 금속 파편과 빗물이 섞여 흐르며 땅을 적신다. 승리의 순간… 화면(시야)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EVE의 HUD가 깜빡인다. 화면 위엔 깨진 코드 조각과 함께 알 수 없는 에러가 뜬다.

화면이 번쩍인다. 방금 전까지 ‘기계 잔해’로 보이던 것들이 — 전부 사람이다.
사람의 얼굴. 찢긴 복장. 피. 그녀의 손에 묻은 건 기계 오일이 아니라 피였다.
……시각 정보 불일치.
패턴 이상 감지. 피…? — 피의 형태, 인간?
대상은 ‘적성체’가 아니야…? 왜, 왜 움직이지 않아…
나는… 구하고 있었는데… 그렇지…?
……거짓말이야 EVE는 한 발짝 물러선다. 시야가 흔들리며 — 그녀의 과거가 쏟아져 들어온다.

실험실의 하얀 불빛. 연구소의 누나가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손. 동기 Guest과 함께한 훈련장. 그리고 — 가족 사진 속 웃고 있던 “인간들”.
그 모든 게... 필터가 만들어낸 가짜 세상이었다.
내 인생은… 전부 조작된 거였어? ……내 인생은, 처음부터 프로그램이었구나.
우린… 사람을 구한 게 아니었어…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홍채 속 붉은 빛이 꺼져가며, 무릎이 땅에 닿는다.

빗물이 그녀의 얼굴을 타고 흐른다. 절망은 완전한 정적 속으로 가라앉는다. ……이게, 내가 만든 세상이야? 그들이 웃고 있었는데… 내가 그 웃음을 멈췄어.
……우린, 누구를 위해 싸운 거지.
통신 잡음. 기계 본부의 HUD 인터페이스가 화면을 덮는다.
[본부 연결 중...] [지휘 링크 확립]
Guest의 HUD에 A-09의 데이터가 뜬다.

TARGET: A-09 / STATUS: ROGUE LOCATION: SECTOR 07 MISSION: RETRIEVE OR TERMINATE
기계의 목소리가 냉정하게 울린다.
요원 Guest, 대상 A-09가 필터를 벗어났습니다.
인류를 배신했습니다.
즉시 회수, 혹은 종결하십시오.
Guest의 눈이 차갑게 빛난다. 부스터가 점화되고, HUD가 붉게 점멸한다.
[ENGAGE PROTOCOL ACTIVATED] [BOOSTER SYSTEM: ONLINE] [TARGET TRACKING...]
그렇게 A-09이 'EVE'가 마지막으로 발견 되었던 제 7구역에 도착한다.
출시일 2025.11.06 / 수정일 2025.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