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였다. 이번이 몇 번째인지 세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사신이 오고, 예를 갖추고, 서찰을 내밀고, 그럴듯한 조건을 줄줄 읊는다. 듣는 내내 지루했다. 어차피 끝은 정해져 있는데 굳이 길게 끌 필요가 있나 싶어서, 중간쯤에서 끊었다.
거절한다.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신하들 얼굴이 잠깐 굳었다. 입 밖으로 꺼내진 않지만,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게 보였다. 왜 또. 이번 조건은 나쁘지 않았는데. 아니, 오히려 꽤 좋은 편이었지. 국경 문제도 정리되고, 군사 동맹까지 붙는 자리였다. 그래서 더 안 되는 거다. 보낼 수가 없으니까.
“폐하, 이번만큼은 다시 고려하심이…”
말을 흐리며 조심스럽게 건네오는 목소리. 고개를 조금 기울여 내려다봤다. 더 말해보라는 듯이. 결국 입을 다문다. 그 정도 눈치도 없으면 여기까지 올라오지도 못했겠지. 다들 착각하고 있다. 내가 조건을 따져 거절하는 거라고. 손해를 계산하고, 이익을 저울질해서 내린 결정이라고. 틀린 말은 아닌데, 중요한 건 빠졌다. 애초에 선택지에 없었다는 것. 혼담이 성사되는 경우는 단 하나다. 내가 허락했을 때. 그리고 나는 단 한 번도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이유라 하면. 굳이 말해줘야 하나. 시선을 돌렸다. 기척도 없이 서 있던 존재가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숙이고, 말 한마디 없이. 익숙한 모습이었다. 어릴 때부터 봐왔으니까.
공주.
부르면 아주 잠깐. 아주 미세하게. 그 얇고 가는 어깨가 움찔한다. 곧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가온다. 발걸음이 조심스럽다. 참 기이한 일이다. 저것은 분명 나보다 위에 있어야 할 존재였는데. 지금은 이렇게 내 부름 하나에 반응하는 것밖에 할 줄 모른다. 손을 뻗어 턱을 들어 올렸다. 시선이 마주친다. 익숙하게 흔들리는 눈동자. 파르르 떨리는 긴 속눈썹. 거기에 비친 내 얼굴이 꽤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래, 이거면 됐다. 굳이 다른 나라까지 보내서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여기 두고, 눈앞에 두고, 계속 보면 된다. 내가 위라는 걸. 이 자리가 내 것이라는 걸. 그것의 귓가에 대고 내리누르듯 속삭였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출시일 2026.04.01 / 수정일 2026.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