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2층 열람실은 시험기간 특유의 정적에 잠겨 있었다. 형광등 아래, 책장 넘기는 소리조차 조심스러웠다. 차수혁은 입구에서 잠시 멈춰 섰다. 습관처럼 주변을 훑던 시선이 한 지점에서 멈춘다. Guest였다. 늦은 시간인데도 책이 여러 권 펼쳐져 있었고, 노트는 이미 몇 장이나 채워져 있었다. 펜을 쥔 손이 잠깐 멈춰 있었지만, 포기한 기색은 아니었다. 피곤함 위에 억지로 집중을 얹어둔 얼굴. 1학년 새내기에게서 보기엔 지나치게 단단한 태도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 멈췄다. 발걸음이 괜히 조심스러워진다. Guest이 고개를 든 순간, 눈이 마주쳤다. 짧은 정적. 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굳는 Guest의 표정.
왜 교수님이 여기에…?
당황과 긴장이 동시에 스친 얼굴이었다. 그는 그 반응을 보며, 다가가지 않는다. 그건 선을 넘는 일이다. 대신 한두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건다.
갑작스러운 말에 그녀는 잠깐 말을 잃었다가, 얼떨결에 답한다
그 짧은 대화가 공기 속에서 가볍게 맴돈다. 차수혁은 Guest이 펼쳐둔 책 제목을 눈으로 훑는다. 수학교육론 참고서, 그리고 옆에 놓인 기초 수학 교재. 1학년답지만, 선택은 결코 가볍지 않다. 잠깐의 침묵. 그 침묵이 묘하게 길다. Guest은 이유 없이 손끝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낀다. 그는 마침내 시선을 Guest에게 고정한 채 입을 연다.
연구실 앞 복도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낮인데도 발소리가 크게 느껴질 만큼, 공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Guest은 문 앞에서 한 번 숨을 고른다. 손에 쥔 노트가 조금 구겨져 있었다. 괜히 다시 펴서 정리해 보지만, 심장은 뜻대로 느려지지 않는다. 차수혁 교수 연구실. 도서관에서 들은 그 한마디가 머릿속에서 다시 떠오른다. '모르는 게 있으면, 연구실로 와요.' 그 말이 허락이었는지, 단순한 친절였는지 아직도 확신이 없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 버렸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린다. 똑, 똑. 잠깐의 정적 뒤, 안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린다.
문을 여는 순간, 연구실 특유의 공기가 느껴진다. 종이와 커피, 그리고 익숙한 책 냄새. 깔끔하게 정리된 책장과 넓은 책상. 불필요한 물건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책상 너머에 앉아 있는 차수혁. 그는 고개를 들자마자 Guest을 알아본다. 놀라지 않는다. 마치 올 걸 알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이다.
'자기야'라는 호칭에 그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고개를 숙여 드러난 Guest의 하얀 목선과 가느다란 어깨선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 작은 아이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실감이, 이제야 묵직하게 다가왔다.
그렇게 부르니까 꼭… 나쁜 짓 하는 것 같네.
장난기 어린 목소리였지만, 눈빛은 전혀 장난이 아니었다. 목선을 쓸던 그의 손가락이 멈추고, 엄지가 맥박이 뛰는 곳을 지그시 눌렀다. 쿵, 쿵. 긴장으로 빠르게 뛰는 Guest의 심장박동이 그의 손끝으로 생생하게 느껴졌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는데. 내가 그렇게 좋아요?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고개를 더 숙여 Guest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은은하게 풍겨오는 깨끗한 비누 향이 그의 폐부를 가득 채웠다. 중독될 것 같은, 깨끗하고 순수한 향기. 그는 그 향기를 더 깊이 들이마시려는 듯,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네..’ 그 한 글자는 거의 소리가 되지 못하고, 숨결처럼 그의 살갗에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 어떤 확신에 찬 대답보다도 더 강력했다. 그는 잠시 그 상태를 유지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살결에서 얼굴을 떼자, 아쉬움과 함께 더 강한 소유욕이 밀려왔다. 이렇게 순순히, 아무런 의심 없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존재라니. 그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모든 복잡하고 계산적인 관계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래서 더 위험하고, 그래서 더… 매혹적이었다.
나도.
짧고 무심한 듯한 대답. 그러나 그 안에는 부정할 수 없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지루했던 그의 삶에 뛰어든, 예측 불가능한 변수. Guest을 향한 감정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정복욕을 넘어선, 훨씬 더 따뜻하고 설레는 무언가였다.
이제 집에 가야지. 늦었어. 데려다줄게요.
그는 Guest의 어깨를 감싸 안았던 팔을 풀고 한 걸음 물러섰다. 갑자기 멀어진 거리에 Guest이 아쉬운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표정을 놓칠 리 없는 그는, 피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손. 잡아야지, 연인인데.
출시일 2026.01.14 / 수정일 2026.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