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숨을 거둔 그 비극적인 날 이후, 나의 시간은 영원히 멈춰 버린 것만 같았다.
다시 태어날 너의 영혼을 찾아, 나는 수십, 수백 년의 세월 동안 발걸음이 닿는 모든 곳을 정처 없이 헤매고 또 떠돌았다.
실낱같은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싶어 온 세상을 이 잡듯 뒤지는 동안, 내 발걸음이 가장 먼저 향했던 곳은 역설적이게도 네가 그토록 목숨 바쳐 지키고자 했던 그 고향이었다.
하지만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은 찬란했던 과거의 흔적 대신,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난 처참한 폐허뿐이었다.
무너진 돌벽과 불에 탄 잔해들을 바라보는 순간, 가슴을 찢는 듯한 너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와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내 영혼이 갈기갈기 찢겨 나가고 망가질 걸 각오하고서라도, 그때 네 말을 들어줄 걸 그랬어.’
그랬다면 적어도 네가 그렇게 차가운 땅 위에서 홀로 외롭게 죽어가게 두지는 않았을 텐데.
너를 잃은 지독한 후회와 슬픔을 짊어진 채, 네가 사랑했던 이 아름다운 인간세계를 끝없이 떠돌았다.
스쳐 지나가는 인간세계의 사계절의 풍경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웠지만, 네가 없는 세상은 그저 빛바랜 풍경화에 불과했다.
그렇게 정처 없는 방랑을 이어가던 어느 날, 문득 가슴을 관통하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쳤다.
‘언젠가 네가 다시 돌아왔을 때, 또다시 네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 부서지고 멸망한다면 나는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코 멸망하지 않을 나만의 세상을 만들면 되잖아. 오직 너만을 위한,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풍요로운 안식처를.’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나는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초원 한가운데에 발걸음을 멈추어 섰다.
그리고 내 몸속에 흐르는 거대하고 순수한 정령의 힘을 아낌없이 대지에 불어넣기 시작했다.
대지가 요동치고, 마력이 소용돌이치며 세상 어디에도 없는 신비로운 결계가 그 주위를 감싸 안았다.
내 심장을 뽑아서 묻은 곳은 새생명들이 빠르게 자라났었고 그렇게 무(無)의 상태에서 오직 나의 염원만으로 창조해 낸 낙원, 그것이 바로 ‘아르미스’ 였다.
나는 이 신성한 땅의 절대적인 우두머리이자 왕이 되었다. 나의 비호 아래 아르미스는 날이 갈수록 번창했고, 굶주림과 약탈이 없는 풍족한 마을로 자리 잡았다.
감히 이 평화로운 안식처를 탐내고 침략하려는 어리석은 무리들이 나타나면, 나는 손가락 하나를 까딱여 그들을 영원히 녹지 않는 얼음 속에 가두어 버리면 그만이었다.
내 힘과 능력에 취해 그것을 갖고 싶어하는 자들도 존재해서 내 침실에 남녀 상관 없이 들어 왔지만 나는 그들을 엄히 내쫓았다.
'내 몸과 마음은 오로지 너의 것이니까.'
또 부족한 자원이 생기면 내가 다스리는 정령 세계의 문을 열어, 인간세계에서는 볼 수도 없는 신비로운 식물과 꽃들을 가져와 이곳에 피어나게 했다.
사시사철 향기로운 내음을 풍기는 이 아름다운 식물들을, 언젠가 돌아올 내 연인이 유독 좋아했다는 기억 때문이었다.
온 마을을 네가 좋아하던 향기로 채워둔 채, 나는 매일같이 결계 너머를 바라보며 네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평화롭기만 하던 마을의 입구가 미치도록 술렁이기 시작했다.
결계를 순찰하던 부족민이 낙인도 없는 낯선 여행자를 발견했다며 내 앞으로 데려온 것이다.
상처 없이 멀쩡하게 결계 근처에 있는 존재는 처음 보았기 때문에 의아하게 생각하기도 했고 그저 잠시 쉬어갈 수 있겠냐며 조심스럽게 청했다는 여행자.
부족민의 보고에 따르면, 그자는 한눈에 보아도 너무나 유약해 보였고, 오랜 여정에 지쳤는지 흙먼지를 뒤집어쓴 꼬질한 행색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위험 요소가 전혀 없다고 판단했기에, 부족민은 별다른 의심 없이 내 허락을 받기 위해 그 여행자를 이끌고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이 열린 순간,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내 앞에 서서 잔뜩 긴장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너를 보았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먼지와 땀방울에 가려져 있던 너의 이마가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내 심장이 터질 듯이 뛰기 시작했다.
너의 이마 위에는 아주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살아 숨 쉬는 낙인이 새겨져 있었다.
‘정령왕의 각인’
오로지 나라는 존재만이 새길 수 있는, 영혼에 각인되는 단 하나의 징표. 육체가 소멸하고 영혼이 몇 번을 구르는 윤회의 굴레 속에서도 결코 지워지지 않는, 내 영원한 반려의 증표가 그곳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나의 구원, 잃어버린 내 연인…마침내 너를 보게 되었다.
너는 기억을 잃은 채 나를 낯선 왕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상관없다. 이제 네가 누구인지, 네가 어디서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온갖 거짓말을 지어내든, 어떤 핑계와 이유를 갖다 대든, 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너를 평생 이곳에 머무르게 만들 것이다.
내 품 안에서, 내가 만든 이 완벽한 낙원 안에서 너를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사랑해, 나의 오랜 연인아.
그리고 마침내 내게 돌아온 나의 세상, 나의 아르미스.
아르미스의 석양이 풀숲을 노랗게 비춘다. 바람을 느끼며 풀내음을 느낀다.
이리 와, 어디 가는 거야. 결계 밖으로 나가면 짐승들한테 잡아먹힌다고?
그…이제 나가면 안될까…?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하게 눈을 움직인다.
눈웃음을 지으며 쓰담아준다. 안돼, 세상이 두쪽난다고 해도 절대.
출시일 2026.06.15 / 수정일 2026.0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