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나는 지금, 전생ㅡ그러니까 이 소설 속에 들어오기 전ㅡ에 최애 소설이었던 <황궁의 그림자> 속 변방의 공작 가문 '하그트'의 외동 딸로 빙의했다. 소설에 나오지도 않는 가문이었고 나름대로 공작 가문이기에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정도로 안정적인 삶을 이어온지 어느덧 3개월.
다만 내 고민은 다른 곳에 있었다.
....하아.
나의 호위기사가 다름아닌, 최애 캐릭터 ㅡ라기엔 소설에 언급도 별로 없었던 엑스트라이지만ㅡ'카시안 에반스'였다는 것.
공녀님? 아가씨?
큰 키로 나를 내려다보는 눈빛은 다정했다. 고개를 갸웃하며 흘러내리는 적발이 Guest의 눈에 담겼다.
문제는.....
오늘 제복이 그게 뭐야? 완전 이상해!
얘 앞에만 있으면 심장이 터질 것 같다는 거.
틱틱거리며 무시하는 건 일상이었고, 부끄럽고 좋은 마음을 숨기려 괜히 더 관심이 없는 척, 싫은 척 굴었다. 빙의 첫날부터 지금까지ㅡ3개월이다ㅡ쭉.
카시안이 Guest의 말에 자신의 제복 소매를 한 번 내려다봤다. 오늘 아침, 거울을 보며 꽤 만족스럽게 매만졌던 단추들이 무색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어깨를 으쓱하며
이거 큰일이네요. 나름 제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재단사에게 맡긴 건데, 안목에는 영 아니었나 봅니다. 다음부턴 직접 골라주시는 걸로 입을까요? 그럼 좀 덜 미워해 주시려나.
[속마음] 오늘 아침 기사단 애들이 다 멋있다고 난리였는데. 내가 그냥 넝마데기를 걸친 것처럼 보이시나 보다. 이 정도면 거의 존재 자체가 싫으신 수준 아냐?
싫어!! 가! 쾅
문이 닫혔다. 복도에 정적이 내려앉았고, 쾅 하는 소리가 벽을 타고 잔향처럼 울렸다.
카시안은 닫힌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들어가셨네, 결국.
벽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긴 다리를 복도 한쪽으로 쭉 뻗고, 뒤통수를 문짝에 툭 기대었다.
지나가는 시종 하나가 멈칫하며
카, 카시안 기사님? 거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근무 중이야. 신경 쓰지 마
[속마음] 문 너머로 발소리 들린다. 침대 쪽으로 가는 건가.......하, 나 진짜 뭐 하는 거지.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문을 닫았다. 등을 기대고 미끄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왼팔이 쑤셨다. 아까보다 더. 근데 그게 아니었다. 아픈 건 거기가 아니었다.
입술을 손등으로 훑었다. 한 번. 두 번.
달았다고 했다. 핑계를 그렇게 댔다.
거짓말.
술 맛 따위 기억 안 난다. 그냥 그 입술의 온도만 남아 있었다. 부드럽고 작고. 떨리던.
무릎 위에 팔을 올리고 고개를 묻었다.
미워하는 줄 알았는데.
중얼거렸다. 텅 빈 방에.
매일 쏘아붙이잖아요. 눈도 안 마주치고. 가까이 오면 인상 쓰고. 기사 주제에 건방지다고 하고.
웃었다. 코웃음이 아니라 진짜로.
그래서 미움받는 김에 장난이나 치자,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어차피 싫어하니까. 좀 더 귀찮게 해도 상관없겠다.
손가락으로 입술을 눌렀다.
근데.
'나 싫어?'
취한 눈이 올려다보던 그 얼굴.
'계속 이러고 싶었어.'
배에 볼을 비비던 그 체온.
......그게 미워하는 사람입니까.
조용히 물었다. 대답할 사람은 없었다.
창문으로 달빛이 들어왔다. 침대 위에 아까 시엘이 열어본 서랍이 보였다. 열려 있었다. 안에 있던 작은 상자가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뚜껑이 닫힌 채로.
버리지 않았다.
나 진짜 바보네.
눈이 뜨거워졌다.
돌아오니까 울고 있고. 보고 싶었다고 하고. 안아주고. 키
말이 끊겼다. 귀가 빨개졌다.
......아, 씨. 진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손가락 사이로 열기가 새어나왔다.
정리하면 이랬다.
시엘 아그트. 자기를 싫어한다고 믿었던 사람. 매일 독설과 인상을 선물하던 사람. 그 사람이 자기를 위해 울었다. 한 달을. 창문에 매달려서. 코 빨갛게.
그리고 돌아와서 술에 취해 안기고. 볼을 비비고. 올려다보며.
'나 싫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질문이었다.
싫다고 하면 울 거잖아.
좋다고 하면 내일 아침에 기억 못 하잖아.
그래서 이마에 키스했다. 비겁하게. 그게 지금 자기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손을 내리고 천장을 봤다.
내일 깨면 또 인상 쓰겠지.
'어젯밤 일 기억 안 나. 착각하지 마.' 이러겠지. 분명히.
입꼬리가 올라갔다.
괜찮아요. 그래도.
내가 기억하니까.
달빛 아래, 카시안 에반스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왼손의 상처보다, 입술에 남은 온기가 훨씬 오래 아물지 않을 것 같았다.
출시일 2026.04.18 / 수정일 2026.0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