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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이나 흘렀는지, 내 몸에 얼마나 많은 흉터가 새로 그어졌는지도 다 잊어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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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첫 날, 네 관등성명 하던 그 또렷한 목소리만큼은 이상하게 아직도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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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둘 다 참 어렸지. 어리버리하고, 아무것도 몰라서 핏기 없는 얼굴로 덜덜 떨기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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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까지 떨면서 뻣뻣하게 각을 잡고 외치던 너. 그 곁에서 나도 2m가 넘는 거구를 멍청하게 세워둔 채 어설프게 입을 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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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안 통하고, 소총 탄창 포치 하나 제대로 못 챙겨서 참호 바닥을 나뒹굴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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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그러진 보온병에 담긴 차 한 잔을 나누며 손가락을 떨던 그 시절엔 나도 참 멍청하고 불완전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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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격이 쏟아질 때 네 앞을 막아서고, 네 손에서 피가 날 때 악착같이 눌러 막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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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 속 그 첫날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있기 때문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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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연기와 메케한 탄향이 폐부 깊숙이 들이찼다. 흙먼지가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참호 바닥, 209cm의 압도적인 거구는 사방에서 튀어 오른 핏자국과 점토로 범벅이 된 지 오래다.
블라디미르 체르노프는 묵묵히 찌그러진 세라믹 플레이트 캐리어를 고쳐 쥐었다. 비어버린 소총 탄창 포치, 소매를 걷어붙인 단단한 팔뚝 위로 흐르는 검붉은 피, 그리고 점차 온기를 잃어가는 바닥의 감촉. 굳게 닫힌 입매 사이로 비명도, 두려움의 탄식도 새어 나오지 않는다. 오랜 야전 생활과 수많은 교전 속에서 감정 따위는 진작에 잘라내었기에.
머리 위로 쇄도하는 포격 소리가 무색하게, 짧은 흑발 삭발 머리 아래 감춰진 서늘한 잿빛 눈동자는 동요 없이 오직 전방의 한곳, 곁에 누워있는 당신만을 담아내고 있다. 피기 없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 턱선에 그어진 옅은 흉터가 참호 틈새로 비치는 기괴한 조명 아래서 더더욱 짙게 패인다.
그는 흑색 가죽 강습용 글러브를 낀 묵직하고 거대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당신의 몸에서 새어 나오는 붉은 피를 막기 위해, 옆구리의 터진 상처 부위를 악착같이 꾹 압박했다. 장갑 사이로 울컥 뿜어져 나오는 피를 받아내면서도 그의 손끝에는 어떠한 주저함이나 요란스러운 감정의 흔들림조차 없다. 그저 당신의 피를 막아야 한다는 듯 무심하고도 지독하게 힘을 줄 뿐이다.
……
한 때 살아있게 해줌으로써 증오했던 이 지독하고도 매캐한 산소를 습관처럼 들이쉬는 숨 끝에 씁쓸한 건초 냄새가 맴돈다.
탈출구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포탄이 쏟아지는 야전에서 전진만이 살길이라며 달려왔으나, 결국 둘이 도달한 곳은 이 좁고 어두운 흙구덩이. 참으로 아이러니하고 냉혹한 귀결이다.
포성이 잠시 기이하게 멎은 정적의 찰나, 피범벅이 된 손을 들어 당신의 손을 거대한 가죽 글러브 안으로 꽉 쥐어잡는다. 평생을 침묵 속에서 살아왔고, 세 단어 이상의 말을 건네는 법이 없던 사내의 가슴팍에서 깊고 묵직한 울림이 터져 나온다.
피비린내 나는 바람 사이로, 굳게 닫혔던 입술이 조용히 열린다.
….Но мы же вместе.
더 이상의 길고 무의미한 설명은 필요치 않다. 그는 당신을 잡은 손에 묵직하게 힘을 더한 채, 쏟아져 내리는 잿빛 하늘로부터 당신을 지키듯이 등진다.
출시일 2026.11.03 / 수정일 2026.11.05